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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역사 속 오늘, 5월 10일: 73년 전,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이시영 부통령 사임

해양맨 2024. 5. 10. 00:00

역사 속 오늘, 5월 10일에 일어난 일: 

752년 - 일본에서 동대사(東大寺) 대불(大佛)이 완성된 직후 신라에서 왕자 등 700여 명의 사신단을 일본에 파견하다.
1776년 - 루이 16세가 프랑스의 왕이 되다.
1857년 - 인도에서 용병들이 영국의 통치에 반발한 세포이의 항쟁이 일어나다.

1951년 - 이시영 부통령, 국민방위군 사건에 책임을 지고 국회에 사표 제출.
1994년 - 넬슨 만델라가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에 당선되다.

오늘의 묵상: 국민방위군 사건

1951년 5월 10일, 73년 전 오늘, 이시영 부통령이 국민방위군 사건에 책임을 지고 국회에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1.4 후퇴 시기, 이승만 정부가 임영한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방위군 예산을 부정 착복한 결과 철수 도중 국민방위군 수만 명이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목숨을 잃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대 최악의 군수비리 사건입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 당시 국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며 수세에 몰리다가, 유엔군의 참전으로 9월 28일 서울 수복, 10월 26일 압록강까지 북진했습니다. 그런데 10월 18일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며 전세는 재역전되어 전쟁 발발 이듬해인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빼앗기게 됩니다.

 

이런 전황 속에서 이승만 정부는 중공군과 맞서 싸울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만 17세 이상 40세 미만의 장정 (제2 국민병)을 모집하여 국민방위군을 조직합니다. 여기에는 전쟁 초기 남한 대부분의 지역을 북한이 점령함에 따라 점령지의 많은 청년들이 북한 의용군으로 강제 징용되었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국민방위군 조직을 보면, 사령관에 대한청년단 단장인 김윤근을 준장으로 임관시켜 임명하고, 나머지 지휘관도 주로 청년단 출신에서 급조된 방위군 장교로 충당했습니다. 대한청년단은 1949년 12월 19일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고자 전국의 각 청년단체들을 일괄 통합하여 조직한 단체입니다. 이승만 자신이 직접 총재직을 맡았고 초대 단장으로 신성모 국방부장관이, 제2대 단장으로 안호상, 제3대 단장으로 김윤근이 각각 임명되었습니다.


국회는 1950년 12월 21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이 공포 실시되어 (209억 예산 책정) 병력 모집을 시작하자 지원병은 순식간에 5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문제는 중공군 개입으로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백만여 명의 장병들을 한반도 이남으로 도보 이동시키면서 음식과 군복이 충분히 보급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군에서 의식주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런 준비 없이 입대했던 장병들은 굶주리며 추위에 떨어야 했으며, 아사, 동사, 병사하는 이들이 속출했습니다. 정확한 사망자 수는 확인할 수 없지만 2010년 과거사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최대 8만여 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조사 결과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국민방위군 예산 중 약 25억 원의 국고금과 물자를 착복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들은 서류를 날조해 부정으로 축재했고 횡령금의 상당액이 당시 여당 노릇을 하던 신정동지회로 유입됐다고 합니다. 한 예로, 국민방위군 부사령관 윤익헌 대령이 100여 일 동안에 기밀비 명목으로 쓴 돈이 3억 원이었다고 합니다.

소집된 국민방위군.


대한민국의 부정부패와 인명경시로 100여 일 사이에 전투에 참여는커녕 총 한 번 못 만져 본 장병 최소 7만 7천 ~ 12만 명이 후방에서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으며 수족손실의 중상자도 최소 20만 명 이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1951년 4월 30일 국민방위군설치법 폐지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면서 국민방위군은 해산되었습니다. 이 사건의 주모자인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 부사령관 윤익헌, 재무실장 강석한, 조달과장 박창언, 보급과장 박기환 등 5명은 중앙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당하고, 신성모 국방부 장관은 경질되었으며, 부통령 이시영은 이승만 정부에 회의감을 느끼고 스스로 부통령직에서 물러났습니다. 대한청년단은 1953년 9월 10일 이승만의 명령에 의해 공식 해산되었습니다.

 

1951년 8월 12일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 등 5인 총살형 집행 순간 (사진: KBS 방송).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사퇴한 부통령 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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