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2월 25일: 41년 전, 이웅평 대위와 미그-19기 귀순
역사 속 오늘, 2월 25일에 일어난 일:
1400년 - 이방원이 왕세자로 등극하다.
1983년 - 북한에서 이웅평 대위가 미그-19기로 대한민국에 귀순.
1988년 - 대한민국 제13대 노태우부터 제18대 박근혜 대통령 취임일.
(제19대 문재인 대통령 이후 5월 10일에 취임.)
1994년 - 팔레스타인의 헤브론에서 극우 유대인의 총기난사로 29명 사망.
오늘의 묵상: 귀순용사 이웅평 대위
1983년 2월 25일, 41년 전 오늘, 북한에서 이웅평 대위가 미그-19기로 대한민국에 귀순했습니다.
김책공군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인민군 공군 1 비행사단 책임비행사로 복무하던 중이던 이웅평 상위 (한국 계급으로 대위)가 소련제 미그-19 전투기를 몰고 월남했습니다.
북한 공군 장교가 자기 비행기를 몰고 서해의 북방한계선을 넘어 탈북한 드문 사례 중 하나로서, 당시 귀순 기종 중에서는 최신예인 MiG-19 전투기로서 그가 탈북할 때 북한군의 기습공습인 줄 알고 전국에 경계경보가 발령되기도 했었습니다.
앞서 비행기를 몰고 탈북한 최초의 사람은 1950년에 Il-10을 몰고 귀순한 이건순 중위이며, 6.25 전쟁 직후 1953년 노금석이 MiG-15기를 몰고 귀순한 적이 있습니다. 1955년에 이운용 상위와 이인선 소위가 Yak-18기를 몰고 귀순, 1960년에 정낙현이 귀순했으며, 1983년 2월에는 이웅평과 같은 해 8월 이철수가 귀순했습니다. 그리고 귀순 의도는 아니었지만 1970년에 불시착한 박순국 소좌의 경우 설득으로 귀순을 결심한 사례도 있습니다.
아무튼 1983년 2월 25일 당시 한국에서는 한미연합 훈련인 팀 스피릿 훈련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북한에서도 준전시상태에 해당하는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날 훈련을 위해 오전 10시 30분쯤 평안남도 개천비행장을 이륙한 MiG-19 편대 중 그의 전투기는 편대를 이탈하여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습니다.
추격하는 북한기들을 따돌리기 위해 저공비행을 하였고, 레이더망을 피하기 위해 고도 50~100m를 유지하면서 시속 920㎞의 전속력으로 남하, 연평도 상공의 서해 북방한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진입하자 초계비행 중이던 한국의 F-5 전투기들의 요격을 받았습니다. 이에 이웅평은 투항하겠다는 의사의 표시로 MiG-19의 날개를 좌우로 흔들어 귀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이를 확인한 F-5는 미그기를 유도하여 수원비행장에 안전하게 착륙시켰습니다.
공산 진영의 군수품을 가지고 올 경우 장비에 대한 보상을 하도록 한 법률이 있는데 이웅평은 MiG-19기 보로금으로 무려 15억 6천만 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를 2023년 4월 기준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약 61억이 됩니다. 그리고 4월 14일에는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무려 130만 명이 운집한 귀순환영대회도 열렸습니다.
이웅평은 귀순 한달 뒤 대한민국 공군 소령으로 특별임관되었고, 다음 해에 공군사관학교 교수의 딸과 결혼하는 등 남한 생활에 잘 적응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이웅평의 부모와 형제들은 정치범 수용소의 완전통제구역, 누이들은 혁명화구역으로 보내졌으며, 부모는 끝내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1996년에 대령으로 진급한 이웅평은 공군대학 정책연구위원 및 교관으로 근무하다 2002년 5월 4일 국군수도병원에서 간기능부전증으로 사망하였습니다. 북에 남은 가족들 생각에 지속적으로 폭음한 것과, 혹시 모를 테러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이 간을 망가뜨린 원인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을 안고 있으면 몸에 전기가 흘러요. 그리고 아버지 생각이 나지요.
아버지도 나를 이렇게 키웠을 텐데, 아버지한테 내가 죄를 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효가 먼저고 충이 뒤인데 젊은 기분에 충과 효를 혼동하고 산 거죠. 그건 내 죄예요.
하지만 귀순을 선택한 것은 후회가 없습니다.
단지 남한 정권과 북한 정권, 두 개의 정권 중에서 남한정권을 선택했을 뿐이며,
북한의 노동당에는 반역했지만 조국을 배반한 것은 아닙니다."
--- 이웅평 인터뷰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