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6월 7일에 일어난 일:
1099년 - 제1차 십자군 전쟁, 십자군 예루살렘 도착.
1592년 - 임진왜란, 탄금대 전투 발발.
1920년 - 봉오동 전투 승리.
2014년 - 아프가니스탄 북동부 이누르 지역에서 홍수가 발생해 54명 사망, 수천 명의 이재민 발생.
2021년 - 파키스탄 신드주에서 열차 충돌 사고로 최소 37명 사망, 64명 이상 부상.
오늘의 묵상: 봉오동 전투
1920년 6월 7일, 104년 전 오늘, 홍범도가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습니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6일~6월 7일 만주에서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가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 남양수비대 예하 1개 중대와 싸운 전투입니다. 교전 당시 한국 연합독립군은 1,300여 명이었고, 일본군은 500여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 지린성 화룡현 봉오동 일대에서 독립군의 무장항쟁이 활발했습니다. 일본은 신식 무기로 무장한 월강추격대를 필두로 독립군 토벌 작전을 시작했고, 독립군은 불리한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봉오동 지형을 활용해 유인책을 펼치기로 했습니다.
전투는 한국 연합독립군이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일본군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한 연합독립군은 고지 정상에 포위진을 짜고 올라오는 일본군에게 사격을 가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상해임시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 측 피해는 전사자 157, 중상 200, 경상 100명이며 독립군 측 피해는 전사자 4명, 중상 2명에 불과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된 대한북로독군부는 청산리로 옮겨가 김좌진 장군과 연합하여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봉오동 전투는 조선과 만주의 국경 지역에서 한국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벌어진 최초의 교전은 아니었지만 대규모 전투로는 첫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한국 독립군 연합부대가 승리를 거두어 독립군의 사기가 크게 높아졌으며, 이는 만주의 의병조직의 확대와 참가자 증가, 1920년대에 독립전쟁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중국에 본격 침투를 계획한 일본군은 1920년 10월, 훈춘 사건을 조작하여 중국 출병의 빌미를 만들게 됩니다.
봉오동 전투의 주역들인 최진동, 박승길, 이화일 등이 먼저 대전국립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고, 2021년 8월 이들의 상관인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반환되면서 안무, 강상모를 제외한 봉오동 전투의 주역 대부분이 대한민국에 안장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