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10월 1일에 일어난 사건은:
1903년 - 제1회 미국 프로야구 월드시리즈, 보스턴서 개막
1946년 - 미군정 시, 대구 10·1 사건 발생
1949년 -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950년 - 한국 전쟁: 대한민국 육군 3사단 26연대, 강원도 양양군서 한국 전쟁 발발 후 최초로 38선 넘어 북진
1953년 - 한미 상호 방위 조약, 미국 워싱턴 D.C.서 조인
1956년 - 제1회 국군의 날 기념식 열림
1969년 - 영국과 프랑스 공동개발 여객기 콩코드, 세계 최초로 초음속 비행성공
오늘의 묵상: 대구 10.1 사건
1946년 10월 1일, 77년 전 오늘 대구에서 10·1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해방 후 1년, 미군정하에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 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면서 쌀값이 폭등하고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대구시민들이 쌀을 달라는 소위 '기아시위'를 했습니다. 기아로 죽어가는 것을 면하기 위한 순수한 시위를 박헌영의 좌익 세력이 이용하여 경찰진압대에게 무력으로 대항하면서 순수한 시위는 폭동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따라서 기아시위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10월 항쟁, 조선공산당의 선동 및 주도를 주장하는 시각에서는 10월 폭동으로 부르나, 공식적으로는 보다 중립적으로 10·1 사건이라고 합니다.
당시 10.1 사건이 전국적인 규모의 시위로 확장되면서 경찰력만으로는 진압할 수 없게 되자 미군과 남조선국방경비대를 비롯하여 한민당세력, 민족청년단, 서북청년회, 백의사 등이 가담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반공주의 우파단체 관련자들이 시위에 가담한 좌파를 체포한다는 명분으로 테러 또는 재산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속출했습니다.
이 사건의 인명피해 상황은, 명확히 집계된 바 없지만, 대구를 포함한 경상북도 지역에서만 사망자가 경찰을 비롯한 공무원 63명, 일반인 73명으로 총 136명인 것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체포된 사람은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대구폭동은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에 의한 불행한 사건이다.
그러나 그 원인은 우리 경찰 내부에도 있다.
국립경찰은 친일경찰과 부패 경찰관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수도경찰청 수도국장 최능진의 증언
폭동을 주도한 조선공산당의 수뇌 박헌영은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하여 10월 6일 월북 도주하였다가, 11월 23일 남조선 노동당 (남로당)을 결성합니다. 대구 10.1 사건 당시 박정희의 형이자 김종필의 장인인 박상희가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됩니다. 박상희는 독립운동가로, 조선건국위원회 구미지부 창설자로 좌우를 막론하고 구미.선산 지역에서 인망이 높았지만, 그는 조선공산당의 당원이었습니다.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던 박정희는 형의 죽음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으로 남로당에 가입하게 됩니다. 장차 이 경력이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그의 정치노선에 큰 악재가 될 줄을 그는 몰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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