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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역사 속 오늘, 3월 23일: 116년 전, 대한제국 외교고문 스티븐스 저격

해양맨 2024. 3. 23. 00:00

역사 속 오늘, 3월 23일에 일어난 일:

1908년 - 전명운, 장인환 의거 - 스티븐스 저격 사건.
1925년 -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이승만 대통령이 의정원의 탄핵 의결로 대통령직에서 면직되다.
1994년 - 러시아 셰레메티예보 공항에서 홍콩으로 향하던 아에로플로트 593편이 추락, 75명 사망.
2021년 - 화물선 좌초로 수에즈 운하가 마비되다.

 

오늘의 묵상: 스티븐스 저격

1908년 3월 23일, 116년 전 오늘, 미국의 친일외교관 스티븐스가 전명운과 장인환에 의해 저격당했습니다.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는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일제가 한국을 병탄 하는 데 온갖 노력을 경주한 미국 외교관입니다. 1908년 3월 21일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 스티븐스는 일본의 한국 지배를 옹호하는 발언을 일삼았고, 이 지역 한인들은 스티븐스를 찾아가 발언 정정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스티븐스를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에 앉히고, 당시 미국에서 일고있는 반일 정서를 달래고 일본 지배의 정당성을 알리는 임무를 맡겼다.

 

외교고문 재임 당시, 사인교를 타고 출근하는 스티븐스.

 

스티븐스는 “한국은 황제가 어리석어 생각이 어둡고, 정부 관리들은 백성을 학대하며 재산을 탈취하므로 백성의 원망이 심하오. 그리고 백성이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으니, 일본의 보호가 아니면 조선은 러시아에게 먹힐 것이오”라고 하면서, 기사의 정정을 거절하였습니다.

 

이에 격분한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 회원들이 모여 스티븐스의 처분을 논의하던 자리에서 공립협회 소속 전명운이 의거 의사를 밝혔는데 대동보국회 소속 장인환은 무언가 불안한 예감을 느끼고 거사 실패를 대비해서 현장에서 단독으로 대기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스티븐스가 3월 23일 워싱톤으로 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떠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이른 아침부터 페리부두에서 기다리던 전명운은 자동차에서 내리는 스티븐스를 보고 권총을 발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총이 격발 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전명운이 스티븐스에게 달려가 그의 얼굴을 가격하였고, 스티븐스는 전명운을 때리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장인환이 총을 쏘아 첫발이 전명운에게 맞고, 연달아 두 발이 스티븐스를 맞추었습니다. 어깨에 총을 맞은 전명운은 땅에 쓰러졌고, 스티븐스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틀 후인 3월 25일에 사망하였습니다.

 

3월 27일 어깨에 총상을 입고 병상에 있던 전명운은 ‘살인미수’ 혐의로, 장인환은 계획에 의한 ‘일급모살’ 혐의로 각기 샌프란시스코 경찰법원에 기소되었습니다. 전명운은 장인환과 공범 관계가 아님이 드러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고, 장인환은 금고 2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0년 만인 1919년 가출옥하였습니다.

 

장인환 의사와 전명운 의사.

 

당시 교민들은 성금을 모아 변호사를 선임했는데 이때 통역을 하버드 대학에 재학 중인 이승만에게 요청했으나 거절당합니다. 그 이유는 이승만이 지금까지 평화적 외교를 통하여 조국의 해방을 이루고자 꾸준히 쌓아온 미국 정치인들과의 친분을 생각하면 미국 외교관을 죽인 한인들의 재판에 통역을 맡는 것을 부담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통역을 의뢰받은 이승만은 “내가 가서 통역해도 소용이 없으니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 우리 거사가 반미국적이 아니며 애국 충정에서 나왔음을 변론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상항공동회에 보냅니다. 편지를 받은 공동회는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이승만의 한성감옥 옥중 동지 신흥우에게 통역을 맡기게 됩니다. 이 편지의 공개로 이승만이 “예수교인으로서 살인범을 통역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는 누명은 벗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독립기념관에 소장돼 있는 '1908년 3월 25일 이승만이 상항공동회에 보낸 편지'.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 공개돼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재미 한인단체의 통합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가 하나로 통합되어 1909년 2월 국민회가 되었고, 1910년 2월 국민회는 대동보국회와 결합하여 대한인국민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장인환 의사(오른쪽) 출감 후 전명운 의사와 함께 찍은 사진.

 

이 사건은 안중근이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는데, 생전에 스티븐스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결국 자기 친구와 똑같은 방식으로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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