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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역사 속 오늘, 7월 6일: 62년 전, 한강 인도교 폭파 책임자 최창식 무죄 판결

해양맨 2024. 7. 6. 00:00

역사 속 오늘, 7월 6일에 일어난 일:

1785년 - 달러가 미국의 통화로 채택됨

1854년 - 미국 공화당 창당
1946년 - 독립투사 3인의 유해 안장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1962년 - 한강 인도교 폭파 책임자 최창식 대령, 사형 당한지 12년 만에 무죄 판결

1978년 - 대한민국의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9대 대통령으로 박정희가 선출됨

 

오늘의 묵상: 한강 인도교 폭파 책임

1962년 7월 6일, 62년 전 오늘, 한강 인도교 폭파 책임자 최창식 대령이 사형 당한지 12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남침을 개시한 북한공산군은 27일 저녁에는 전차를 앞세우고 서울 외곽을 압박하였으며, 28일 자정을 넘어서면서 국군이 배치되어 있지 않던 청량리쪽으로 전차대의 일부를 빼돌려 새벽 2시경 홍릉일대를 뚫고 들어왔습니다.

또한, 문산과 파주쪽에서 밀고내려온 북한군은 수색 쪽으로 다가서면서 그 중 일부가 김포를 향하여 한강을 넘어올 채비를 갖추었습니다. 당시 육군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북한군의 전차가 시내로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를 폭파하도록 명령하였고, 육군공병학교의 작업조는 28일 오전 2시 30분 경 3개의 철교와 1개의 인도교를 폭파하였습니다.

이 때 북한강파출소와 중지도에는 공병경계분대와 헌병대가 배치되어 교통을 통제하고 있었으나, 이들의 신호를 무시한 채 달려내려오던 수십대의 차량들이 대파되고 수많은 인파가 파편과 폭음 속에 사상을 입는 가운데 폭파현장은 아수라장을 이루었습니다.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너무 일찍, 북한군이 도착하기 7시간 정도 전에, 한강다리를 폭파함으르써 피난 못간 105만 서울 시민 중에 56만 명이 부역혐의로 고초를 겪게 되었습니다.

 

1950년 6월 28일 폭파된 한강 인도교.


서울 외곽을 지키기 위하여 남아 있던 국군의 주력부대와 수많은 시민들을 강북에 남겨둔 채 성급하게 한강교를 폭파하여 그 퇴로를 끊고 만 것은 우리의 전사에 하나의 오점을 남기며 국민의 지탄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폭파 책임자 최창식은 1950년 9월 21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바로 그 날 총살형을 당했습니다. 그에게 폭파 명령을 내렸던 채병덕 소장은 이미 7월에 전사했으므로, 최창식 본인의 책임에 더해 정권 차원의 책임까지 지고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최창식의 아내는 상관의 명령에 따라 한강다리를 폭파한 총책임이 어찌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만 있는 것이냐, 내 남편은 억울하게 사형됐다라며 12년간 법정투쟁을 벌였습니다. 마침내 남편이 총살형을 당한지 12년 뒤인 1962년 재심이 이루어져 무죄판결을 이루어냈습니다. 당시 너무나 억울한 희생양이었다는 동정 여론에 더해, 이승만 정권의 적폐 청산을 요구하는 시대 분위기가 무죄 선고에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끊어진 한강 인도교. 1953년 1월 1일 모습. 존 리치 촬영.

 

국군이 폭파했던 3개의 철교 중 1개의 단선철교는 폭파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나중에 북한군에 의하여 이용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1950년 7월 3일 미 공군기가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한강철교를 폭격했다. 오른쪽은 이미 폭파된 한강인도교.

 

한국전쟁 70주년이 되는 2020년 6월 28일, 노들섬 둔치에 한강인도교 폭파 희생자 위령비가 설치됐습니다. 위령비는 구리 재질로 4.7×1.1m의 삼각형 모양으로 바닥에서 10㎝가량 돌출되어 있으며, 희생자들의 넋을 상징하고자 노들섬에 자생하는 여러 들꽃 그림이 새겨져 있습니다.

위령비에는 "1950년 6월 28일 새벽 한국군은 서울에 침입한 북한군의 도항을 막기 위해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다. 그때 이 자리에서 원통하게 희생된 분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다짐하기 위해서 추모공간을 조성하고 이 글을 새긴다. 서울특별시." 

노들섬 둔치에 설치된 한강인도교 폭파 희생자 위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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