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8월 18일에 일어난 일:
1769년 - 이탈리아 베네치아 근교 브레시아의 세인트 나자로 교회에 번개가 떨어져 보관 중이던 90톤의 화약이 폭발, 도시의 1/6이 파괴되고 3,000여 명이 사망
1906년 - 구한말 의병장 최익현, 일본군에 잡혀 쓰시마섬으로 유배
1949년 - 중앙선 죽령터널 열차탈선 사고로 승객 380명 중 48명이 사망하고 101명 부상
1966년 - 마오쩌둥 지도하의 홍위병 100만 명 텐안먼 광장서 대규모 문화혁명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1987년 - 공연윤리위원회, 〈동백아가씨〉,〈고래사냥〉 등 금지가요 186곡 해금
오늘의 묵상: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1976년 8월 18일, 48년 전 오늘,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으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던 미군 2명이 북한군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당시 판문점은 물리적인 군사분계선이 존재하지 않는 공동경비구역(JSA)으로 북한군과 유엔군의 초소들이 분산되어 서로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엔군 초소에서 바라볼 때 높이 15m의 미루나무 한 그루가 시야를 방해하고 있어서, 유엔군 경비대 작업반은 시야가 확보되지 않으면 위험하므로 미루나무를 베어 버릴 것을 권고했습니다.
이에 8월 6일 유엔군 측에서 미루나무 절단을 시도했는데 북한군이 다가와 이의를 제기하여 작업을 중단했습니다. 이후 경비대는 8월 18일 절단이 아닌 시야 확보를 위한 가지치기만 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한국인 노무자 5명 포함, 경비대 중대장 아서 보니파스 대위, 소대장 마크 배럿 중위 등과 미군 병사 4명, 국군 장교 1명 및 병사 4명 등 총 11명의 군인들이 작업 감독에 나섰습니다.
그러자 북한군 군관 2명과 하전사 8명이 나타나 재차 항의했으나 유엔군은 베는 것이 아니라 가지치기 작업을 하는 중이라고 설명했고 이에 현장에 있던 북한군도 상부에 연락을 한 뒤 답이 오자 가지치기 정도면 좋다고 수긍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박철 중위 등 북한군 장교 2명이 15명의 병력을 이끌고 현장에 나타나 갑자기 작업 중단을 요구했지만 보니파스 대위는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이에 박철 중위는 지원 병력을 요청하였고, 오전 11시 30분경 북한군 20여 명이 트럭을 타고 추가로 도착했습니다. 이때 박철 중위는 그만두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재차 위협을 가했으나 보니파스 대위는 무시했습니다.
이에 박철 중위가 "죽여!"라고 소리지르자 북한군들은 트럭에 싣고 온 둔기와 한국인 노무자들이 사용하던 도끼를 이용해 기습적으로 집단 폭행을 가했습니다. 보니파스 대위가 북한군의 구타에 가장 먼저 쓰러졌고 북한군은 쓰러진 그에게 달려들어 도끼로 머리를 찍어서 무참하게 살해했습니다. 마크 배럿 중위는 구타당한 채 방치되었다가 이송 중 사망하였습니다.
나머지 병사들도 유엔군 병사 1명을 제외한 전원이 부상을 당했고 유엔군 트럭 3대가 파손되었습니다. 당시 보니파스 대위는 후임 중대장과 인수인계를 거쳐 한국에서의 근무가 3일 남은 상태였으며, 배럿 중위는 JSA에 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사건 다음날인 8월 19일 미국은 북한군의 행위를 비난하며, 이 사건 이후 벌어지는 어떠한 사태에 대해서도 북한이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른 후속조치로 미국은 데프콘 2(공격준비태세)를 발령했고 미국 본토에서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F-111 전투기 20대를 한반도로 긴급 파견했으며 괌에서는 B-52 폭격기 3대, 오키나와 미공군기지에서 F-4 24대가 한반도 상공을 선회하였습니다. 또한 함재기 65대를 탑재한 항공모함 미드웨이호가 순양함 등 호위함 5척을 거느리고 동해를 북상하여 한국 해역에 배치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제1공수 특전사의 보복작전을 수립하고, 유엔군과 함께 미루나무 절단 작전인 ‘폴 버년(Paul Bunyan) 작전’을 8월 21일 실행합니다. M16 소총, 수류탄, 크레모아 등을 트럭에 숨기고 카투사로 위장한 64명의 특전사 요원들은 공동경비구역 내에서의 조선인민군 초소 4개를 파괴하였고, 미 공병들에 의해 미루나무가 절단되며 이 작전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습니다.
조선인민군이 이 작전에 무력 대응할 경우엔 과감히 사살하여 보복을 완료한다는 계획이었으나 오히려 조선인민군은 이에 대응하지 않고 물러서면서 더 이상의 무력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후에 알려진 바로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은 당시 북한 주석인 김일성이 아닌 후계자 계승 과정에 있던 김정일의 지시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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