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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역사 속 오늘, 11월 12일: 61년 전, 김종필-오히라 비밀메모

해양맨 2023. 11. 12. 00:00

역사 속 오늘, 11월 12일에 일어난 일:

1962년 - 김종필-오히라 비밀메모가 작성되다.

1996년 - 인도 차르키다드리 상공에서 항공기 두대가 공중 충돌로 탑승객 349명 전원 사망.
2001년 -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이 카불을 버리다.
2010년 - 포항 요양원 화재 사고로 10명 사망, 17명 부상.

2016년 - 서울특별시에서 6차 민중총궐기가 일어났다 (최대규모의 박근혜 정권 퇴진 시위).

 

오늘의 묵상: 김종필-오히라 비밀메모

1962년 11월 12일, 61년 전 오늘 김종필-오히라 비밀메모가 작성됐습니다.

 

1950년대 이승만 정권이래 지지부진하던 한일협상은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필요한 자금 확보와 일본을 후방보급기지로 활용하려는 차원에서 협상타결을 적극 추진했습니다. 일본도 군사정권과 청구권 문제를 해결하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하였고, 미국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동아시아 지역의 안정과 원조 부담 경감 차원에서 중재에 적극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청구권 문제에서 한일 간의 입장 차이가 컸는데, 1962년 3월 최덕신 외무장관이 고사카 일본외상에게 주장한 청구액은 7억 달러였습니다. 그런데 1962년 10월 21일 열린 1차 회담에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6억 달러를 제시했고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은 독립축하금 또는 경제자립 원조 명목으로 3억 달러를 주겠다고 맞서 합의도출에 실패했습니다.

 

그러다가 11월 12일 4시간여 마라톤협상 끝에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비밀리에 작성됩니다. 그 내용은, 액수는 물론 명목에서도 크게 물러난 "무상원조 3억 달러, 유상원조(해외협력기금) 2억 달러, 그리고 민간차관 1억 달러"였습니다. 유상원조와 차관은 갚아야 할 돈이므로 결국 3억 달러를 받게 되었는데, 그것도 전쟁피해 배상금이 아닌 무상원조 명목이었습니다. 독도 문제 또한 모호한 결론으로 마무리되었고 이 메모에는 배상 청구권 문구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1962년 11월 12일 일본 도쿄 외무성 별실에서 한일 양국 대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외상과의 회담.

 

1962년 11월 12일의 김-오히라 비밀회담과 메모는 결국 1965년 한일수교로 이어지는 단초가 되었다. 이 메모는 43년간 국가비밀로 묻혀있다가 2005년 1월 17일 외교통상부가 일반에 공개함.

 

이러한 합의는 한국 사회에 커다란 저항을 불러일으켰으며, 터무니없이 낮은 전쟁 배상금과 주권을 망각한 대일 굴욕외교의 상징으로 낙인찍힌 김종필은 1963년 2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외유를 떠나게 됩니다. 그 후 1964년 4월, 비밀에 묻혀있던  메모가 야당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극소수 야당 의원들에게 공개되면서 '김-오히라 메모' 파동으로 번지게 됩니다. 이로써  한·일 회담 반대 투쟁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1964년 6.3 사태가 일어나자, 시국수습책의 일환으로 김종필은 이듬해 또다시 2차 외유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김종필은 200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노환으로 2018년 92세로 사망했습니다. 김-오히라 메모 이후 61년이 지났지만 독도 문제와 위안부 협상 등 한일협정의 졸속 합의는 아직도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 쿠데타

1962년 11월 12일: 김-오히라 메모 작성

1964년 6월 3일: 6.3 시위 (한·일 회담 반대 투쟁 시위)

1965년 2월 20일: 한일 기본 조약 가조인 (이후 한일협정 비준 반대 투쟁 악화)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 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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