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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역사 속 오늘, 12월 5일: 129년 전, 동학군의 우금치 전투와 전봉준

해양맨 2023. 12. 5. 00:00

역사 속 오늘, 12월 5일에 일어난 일:

1894년 -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군이 패배하다.

1936년 - 소련에서 스탈린 헌법이 제정되다.

1952년 - 영국 런던에 스모그 현상. 이날부터 5일 연속 계속된 이 현상으로 4,000여 명이 죽음.

1968년 - 대한민국에서 국민교육헌장이 반포되었다.
1995년 - 아제르바이잔 항공 56편 TU-134가 나흐치반에 추락했다.
2014년 - 조현아 당시 대한항공 부사장이 일으킨 대한항공 이륙지연 사건, 이른바 '땅콩회항' 사건이 발생했다.


오늘의 묵상: 우금치 전투와 전봉준

1894년 12월 5일, 129년 전 오늘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군이 패배했습니다.

 

1894년 3월 동학농민운동 1차 봉기는 동학 농민군이 선전해 전주성을 차지하기까지 했으나, 민비가 청군을 끌어들이자 텐진조약에 의해 일본군도 개입하자, 동학 농민군은 합의 하에 자진 해산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 기회를 틈타 한성을 점령하고 고종에게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게 하니 이것이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됩니다.

 

일본이 조선의 개혁을 빌미로 경복궁을 장악하여 군국기무처를 설치하며 남산에 대포를 설치하는 등, '갑오개혁'이라고 불리는 내정간섭을 일삼자, 동학 농민군은 이에 분노하여 일본을 몰아내고자 2차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동학'은 교조 최제우가 서교(西敎:천주교)에 대항하여 동쪽 나라인 우리 나라의 도를 세우려는 목적으로 1860년에 창립하였으며, 제 2대 교조 최시형에의해 평민들 사이에 전국적으로 전파되었습니다. 1905년 제 3대 교조 손병희에 의하여 천도교(天道敎)로 개칭되었습니다.

 

당시 최시형이 이끄는 동학군은 1894년 10월 전봉준의 남접군과 손병희의 북접군이 논산에서 만나 2만에 이르는 대군이 결집하여 한성 탈환을 위해 공주를 공격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우금치3,200여 명의 조선 관군과 일본군 200여 명이 연합하여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일본군에게는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과 자체 개발한 무라타 소총이 있었고, 관군은 소총을 비롯하여 개틀링 기관총과 크루프 제 야포 등을 동원하였습니다. 동학군은 수적으로는 우세했지만 무기라고는 분당 2발 정도 발사하는 사거리 100-400미터의 조총이 조금 있었을 뿐, 주로 창이나, 죽창, 농기구 등 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밀집대형으로 돌진했던 동학군은 개틀링 기관총을 향해 움직이는 과녁판이 되어 결국 추풍낙엽처럼 시체만 수북이 쌓이게 됩니다.

 

분당 400발을 발사하는 미제 캐틀링 기관총.

 

우금치 전투에서 17,000명이 전사하고 살아남은 농민군은 3,000명에 불과했습니다. 이에 농민군은 우금치에서 퇴각하게 되는데 이는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학살'당했다고 할 정도의 압도적인 패배였습니다. 열악한 무기와, 미흡한 훈련, 미숙한 전략으로 동학농민들은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겠지만 그들은 앞으로 돌격했습니다. 어차피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관군에게 잡히면 동학 반란군으로 죽게 될 목숨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국가를 위하여 외세를 몰아내려는 민중의 봉기를 타협이 아닌 무력으로, 그것도 기관총과 야포를 사용하여, 그것도 모자라 일본군을 동원하여, 자기 나라 백성을 죽이는 것이 당연했던 역사가 대한민국에 있었습니다.

 

우금치 전투 상상도.

 

공주 우금치 전적 동학혁명군 위령탑.

 

전봉준은 동학의 고부접주(전북 고부의 동아리 우두머리)로 1890년대 초 한때 흥선대원군 문하의 식객으로도 있었습니다. 1894년 3월 동학농민 운동의 1차 봉기를 주도하였으나 조정의 회유책으로 해산했다가, 2차 봉기 과정에서 흥선대원군과 내통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금치전투와 다른 전투에서 계속 패하며 관군의 체포령을 피해 도피하던 중, 옛 부하의 밀고로 체포되어 도성으로 압송되어 이듬해 4월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봉기와 실패는 조선 백성들의 기억에 '파랑새'라는 민요에 남아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파랑새>

 

여기서 파랑새는 파란색 군복을 입은 일본군을, 녹두는 녹두장군 전봉준을 의미합니다. 청포장수조선의 민중을 의미하는데, 녹두가 없으면 청포(녹두묵)를 만들지 못하므로 청포장수가 슬퍼하는 것처럼, 녹두장군 전봉준이 없으면 민중이 슬퍼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1894년 12월 체포되어 한성부로 압송되는 전봉준은 이듬해 4월 24일 교수형에 처해졌다(향년 40세). 그의 형제들도 연좌되어 사형당했고, 그의 후처 여산송씨는 끌려가 노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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