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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역사 속 오늘, 12월 4일: 139년 전, 갑신정변과 김옥균

해양맨 2023. 12. 4. 00:00

역사 속 오늘, 12월 4일에 일어난 일:

1884년 - 조선에서 개화파에 의한 갑신정변 발생.

1899년 - 한국 최초의 한글 신문이자 최초의 영자 신문인 독립신문이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폐간.
1950년 - 한국 전쟁, 중공군에 밀려 평양 철수 작전.

1991년 - 미국의 팬 아메리칸 항공이 파산되었다.
2012년 - 태풍 ‘보파’가 필리핀을 강타하여 300명 이상의 사망자와 1천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다.

2018년 - 경기도 고양시 백석역 부근에서 한국지역난방공사의 온수배관이 파열되었다.


오늘의 묵상: 갑신정변과 김옥균

1884년 12월 4일, 139년 전 오늘 갑신정변이 발발했습니다.

 

갑신정변은 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홍영식 등 급진 개화파들이 청나라에 의존하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온건 개화파)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려는 쿠데타 사건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3일 천하'로도 불립니다. 

 

12월 4일 저녁 우정국(郵政局) 낙성식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 창덕궁에서 고종과 명성황후를 확보하고 경우궁으로 피신시킨 뒤 민씨 척족들을 일부 처형했습니다. 그날 밤에 살해된 자들은 척신계와 수구파 인사들로 윤태준, 이조연, 한규직, 민영목, 조영하, 민태호, 유재현 등이었습니다. "죽이지 마라, 죽이지 마라"하는 고종의 명을 어기고 자신의 대신들을 죽이는 쿠데타 일당을 보며 그동안 김옥균은 아끼며 급진 개화파를 옹호하던 고종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우정총국. 홍영식은 일본과 미국의 우편제도 견학 후 고종에게 건의, 1884년 3월 27에 우정총국을 설치하고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해 12월 4일 우정총국 개업 축하연회 자리가 갑신정변의 시작이 되었다.

 

이렇게 척신 정권 지도자들을 처형한 개화파는, 12월 5일 새벽 신정부의 발족을 알리고 인사를 단행합니다. 고종의 사촌형 이재원을 영의정에, 홍영식은 좌의정에, 윤웅렬은 형조판서, 박영효는 전후영사, 서광범은 좌우영사, 서재필은 병조참판, 신기선은 이조참판, 승정원도승지는 박영교로 내정하고, 호조참판은 김옥균이 맡기로 하면서 내각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리고 12월 6일 중국 간섭 배제, 문벌과 신분제 타파 등의 14개 조항의 개혁 정책을 내놓으며 쿠데타는 성공하는 듯했습니다.

 

갑신정변의 주도자들로 구성된 '3일 천하'의 내각.

 

그러나 민씨 정권은 이미 청나라의 위안스카이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1,500명의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고, 김옥균을 도와주기로 했던 200여 명의 일본군은 청나라 군대와의 교전 중에 철수하면서 급진 개화파의 권력장악은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적 정치개혁운동은 실패로 끝났는데 그 원인은:

첫째, 20-30대의 소장파 양반 엘리트로 구성된 쿠데타 주세력원들이 혈기만 앞섰지 정치 경험이 부족하고 정세판단이 미흡했습니다. 나이가 제일 많은 김옥균이 당시 33세였고, 홍영식(28세)이 우정국 책임자로 있었고, 박영효(23세)가 한성판윤을 지냈다지만, 21살 서재필이 국방부 장관인 병조참판이 되기에는 좀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민씨 일파의 청나라 세력을 과소평가하여 준비를 철저히 하지 못한 것은 큰 과오입니다. 

 

둘째, 그들이 내세운 14개 조항의 개혁 정책에서 보듯이 민생구제에 대한 개혁정책이 미비하여 민심의 지지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온건 개화파를 물리치고 과감하게 자주와 개방정책을 펴는 것이었지 민생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고, 민심을 얻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셋째, 자주권을 주장하면서 쿠데타를 위하여 일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민심이 쿠데타 세력에게서 등을 돌린 이유이기도 합니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은 21살의 나이에 문과 장원급제를 하고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고, 충의계를 조직하여 개화사상 확산에 힘썼으며, 동남제도개척사 겸 관포경사에 임명돼 울릉도와 독도를 개척했습니다. 임오군란 후 메이지 유신과 같은 일본식 급진 개혁을 주장했으나, 중국의 양무 운동식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외척 민씨 세력에 번번이 발목을 잡히자 결국 갑신정변을 일으켰습니다.

 

갑신정변 당시 조선에는 청나라 군대와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김옥균은 얼마 안 되는 일본군의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청나라의 개입으로 일본군이 배신하며 발을 빼면서 쿠데타는 3일 만에 실패하게 되자 그는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그 후 10년간의 망명생활을 통해 김옥균은 일본 고위층 인사들과 긴밀한 교류를 하게 되는데 그중 한 명인 도야마 미쓰루는 훗날 명성황후를 암살하는데 참여한 낭인 조직의 하나인 '겐요사'를 조직한 인물입니다. 그리하여 민씨 정권은 자객을 보내 김옥균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몇 차례의 암살사건이 미수에 그치면서 일본은 김옥균에게 일본과 조선의 우호에 방해가 되니 일본을 떠나 달라고 공식적으로 요구하게 됩니다. 이에 김옥균은 일본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일본 신문에 고종에게 보내는 장문의 상소와 청나라의 북양대신 리훙장 앞으로 사건의 책임을 따지는 공개서한을 게재하였습니다.

 

1894년 2월 리홍장과 담판을 지으러 상하이로 건너간 김옥균은 조선에서 온 자객 홍종우에게 3월 28일 암살되어 43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조선으로 송환된 김옥균의 시신은 부관참시 후 8도에 효수됐습니다. 그의 가족 역시 연좌제로 처벌되어, 생부 김병태는 처형당하고 모친 등은 음독 자결하였으며, 김옥균의 부인 유씨는 딸 1명과 함께 관비가 되었습니다. 그의 가까운 친척들은 항렬자를 균에서 규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후일 개화파가 집권한 뒤 복권됐고 일제 강점기 순종에 의해 충달공의 시호가 추서 됐습니다.

 

그가 쿠데타에 성공했더라면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앞당긴 선각자요 혁명가  이었을텐데, 실패함으로써 그는 역적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고종은 왜 이국만리에서 돌아온 김옥균의 시신을 부관참시 후 8도에 효수해야만 했을까요? 

 

김옥균(사진 촬영 연도 미상). 갑신정변 당시에는 33세.

 

대역부도(大逆不道) 옥균(玉均). 효수되어 양화나루에 내걸린 김옥균의 수급.

 

김옥균 암살 사건은 일본에게  장기적으로는 조선 합병, 단기적으로는 청과 전쟁을 벌일 수 있는 기막힌 명분이 되었습니다. 일본에 망명하여 일본인이 된 김옥균이 조선으로부터 암살당할 뻔하였고, 결국 청나라에서 암살되었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으로 그해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 청과 일본은 조선 정부의 요청에 의해 정면으로 부딪히니 이것이 바로 '청일전쟁'입니다.

 

한편 정변이 실패한 후 일본 측이 갑신정변을 배후조종했다는 이유로 일본공사관은 불에 타고, 공사관을 지키던 서기관 등이 살해되었습니다. 이를 빌미로 일본 측은 조선정부의 사죄와 공사관 소각에 대한 배상금 지불, 희생자에 대한 구휼금 지급을 요구하니 이것이 '한성조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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