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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역사 속 오늘, 12월 6일: 78년 전, 독립 운동가였던 친일파 윤치호 사망

해양맨 2023. 12. 6. 00:00

역사 속 오늘, 12월 6일에 일어난 일:

1945년 - 윤치호가 80세의 나이로 사망하다.

1979년 - 최규하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대통령 임기를 시작했다.
1992년 - 인도에서 힌두교인의 테러로 우타르프라데시 주의 아요디아에 있던 모스크인 바브리 성원이 폭파당했다.
2007년 - 강화도 해병대 총기 탈취 사건이 발생했다.
2013년 - 도지코인이 도입되었다.
2016년 - 국회 재벌총수 청문회가 열렸다.


오늘의 묵상: 윤치호: 독립운동가? 친일파?

1945년 12월 6일, 78년 전 오늘 윤치호가 사망했습니다.

 

조선에 실망한 독립운동가!

조선인을 사랑했던 친일파!

윤치호를 지칭하는 수식어는 이렇듯 엇갈리고 있습니다. 개화지식인의 대표주자 윤치호는 독립신문사의 창립 인사로서 제2대 사장을 지냈으며,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회장을 맡으면서 계몽 운동, 민권 운동 등을 벌였으나, 그를 시기하는 자들의 모함으로 고종의 오해를 사 1899년 독립협회가 해산됩니다. 그러자 민중들도 윤치호를 황제에게 불충하는 인물로 보게 되었습니다. 이에 고종과 민중에게 실망한 그는 민중을 계몽의 대상에서 개조, 훈련의 대상으로 시각을 바꾸게 됩니다.

 

그리하여 대성학교 등을 통하여 후진 양성에 매진하게 되는데 한일 합병 후 1911년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기독교인 및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 후 10년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러나 3년간 형을 살고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1915년 2월 13일 특별사면으로 출감하게 됩니다. 

 

그가 단지 독립운동을 포기한 것인지 친일파로 전향한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의 의식 속에는 ‘민족패배주의’와 현실적으로 일본의 조선통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대세순응주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독립운동가들로부터 국민대표로 서명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한 것이 한 예입니다. 그는 이런 순진한 애국심에 기초한 무모한 거사는 독립을 불러오기는커녕 일본에게 한국인들을 더욱 가혹하게 다룰 구실만 제공할 뿐이라고 내다보았습니다.

 

그는 조선의 당면문제는 백성들에게 유해한, 맹목적인 독립운동이 아니라 실력을 키워 지적과 경제적인 향상을 통하여 일본인들에게 받는 민족적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 우선임을 강조했습니다. 그가 남긴 대표적인 어록 가운데 하나가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입니다그가 남긴 일기에는 “싸울 수 없다면, 독립을 외쳐봐야 부질없는 짓이다. 우리가 강해지는 법을 모르는 이상, 약자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라는 글도 있습니다.

 

해방이 도둑처럼 왔다고 하지만, 일제강점기 동안 국내외에서 투쟁하고 싸운 이들이 없었다면 광복은 없었을 것입니다. "물 수 없어도 짖어야 한다"라며 투쟁하던 이들이 옳았었는지,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말자"라며 타협하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게 옳았었는지 역사가 답을 줄 수 있을까요? 

 

서재필, 유길준과 더불어 조선의 제1세대 미국 유학생이었던 윤치호. 1941년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지내고 1945년 광복 직전의 모습.

 

윤치호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거액의 국방헌금을 내고 각종 시국강연에서 일제 찬양과 조선인 동원을 촉구했으며,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을 지냈습니다. 이러한 행위로 그는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어 '친일 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1945년 12월 6일 개성 자택에서 뇌일혈로 사망하니 그의 나이 80세였습니다.

 

윤치호의 가문은 당대 다수의 권문세가들이 그러하듯 많은 친일파를 배출했다.

 

그는 애국가의 작사가안창호와 함께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으나 애국가는 여전히 '작사 미상'으로 남아있습니다. 그의 친일 행적이 아무래도 걸림돌이 되고 있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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