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인 인물이 되기를 꿈꾸는 모든 자들에게... 자세히보기

역사속 오늘

역사 속 오늘, 12월 9일: 4년 전,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 사망

해양맨 2023. 12. 9. 00:00

역사 속 오늘, 12월 9일에 일어난 일:

1950년 - 대한민국의 원산 철수 작전.
2011년 - 인도 콜카타의 AMRI 병원에서 화재가 발생, 89명 사망.
2011년 - 인천 공항철도에서 작업을 하던 근로자들이 열차에 치어 5명이 사망하였다.

2019년 -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 사망.
2016년 -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가결. 황교안 국무총리가 대통령직 권한대행 시작.


오늘의 묵상: 김우중과 세계경영의 몰락

2019년 12월 9일, 4년 전 오늘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이 사망했습니다.

 

1967년 자본금 500만 원으로 시작한 대우그룹은 설립 15년 만에 국내 4대 재벌이 되었고, 그 후 16년 만인 1998년에는 삼성을 제치고 현대에 이어 재계 순위 2위에 올랐습니다. '세계 경영'으로 5대양 6대주를 휩쓸던 대우그룹은 41개 계열사와 396개 해외법인을 거느리며 1998년 대한민국 수출액 1323억 달러 가운데 14%에 해당하는 186억 달러를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무리한 기업 인수차입 경영은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금리가 연 30% 가까이 뛰어오르자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달러 환율이 2,000원까지 급등한 것도 해외채무가 많았던 대우그룹 입장에서는 악재였습니다. 자기 자본 대비 부채가 400%가 넘는 대우그룹은 1997년 말 11조 원에 달하던 부채는 1년 후에는 두 배가 되었습니다. 대우그룹 최대 부채는 약 86-89조 원으로 추산되며 이는 당시 정부 예산 84조 원을 초과하여 정부에서조차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외환위기 당시 긴축경영을 하던 다른 기업과 달리 대우는 쌍용차를 인수하고 고금리 자금을 끌어들이는 등의 외형확대에 치중하다가 결국 대우의 부채 60조 원이 금융권 부실로 남으면서 금융권 구조조정, 협력업체의 연쇄도산을 일으켰습니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공적자금 30조 원이 투입되기도 했지만, 결국 1999년 11월 대우 사장단은 사퇴를 제출하고 그룹은 공중분해되어 '김우중 신화'는 32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됩니다.  

2014년에 발간한 《김우중과의 대화》를 통해 김우중은 김대중(DJ) 정부 경제 고위 관료들과의 불화(不和) 등을 언급하며, 대우 해체가 DJ 정부의 ‘의도’ 아래 진행됐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습니다. 김우중은 “수출 금융이 막혀서 할 수 없이 단자, 회사채로 돈을 빌려야 했었는데, 만약 금융시스템이 정상이었으면 빌릴 필요가 전혀 없었던 돈”이라고 반박했습니다

 

1998년 1월 24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과 서울 삼청동 인수위 사무실에서 만나 악수하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 전 회장은 1997~1998년에 걸쳐 분식회계 21조, 사기대출 9조, 외화 밀반출 23조 등 약 41조 원 상당의 부정을 저지른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구속을 피하려고 1999년 10월 해외로 도피했던 김 전 회장은 2005년 6월 귀국하여, 2006년 징역 8년 6개월, 벌금 1000만 원, 추징금 17조 9253억 원을 선고받았으나 1년 정도 복역한 뒤 2008년 특별사면을 받았습니다.

2010년 이후 김우중 전 회장은 베트남에 거주하며 2012년부터는 글로벌 청년사업가(Global Young Business Manager: GYBM) 양성사업에 주력했습니다. 2018년부터 건강이 악화돼 아주대병원에서 알츠하이머로 투병하던 중 2019년 12월 9일 사망했습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로 당시 젊은 층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직장인의 우상’에서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양극단의 평가를 받으며 신화와 몰락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가 83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