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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역사 속 오늘, 3월 9일: 128년 전, 김구와 치하포 사건

해양맨 2024. 3. 9. 00:00

역사 속 오늘, 3월 9일에 일어난 일:

1796년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파리 사교계 여왕 조제핀과 결혼.

1896년 - 김구가 일본인을 죽인 치하포 사건.

1918년 - 러시아, 수도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이전.
1990년 - 동베를린에서 동서독 통일 위한 공식 첫 예비회담 개최.

 

오늘의 묵상: 김구와 치하포 사건

1896년 3월 9일, 128년 전 오늘, 김구가 일본인을 죽인 치하포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치하포 살인사건은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의 한 주막에서 20세의 백범 김구가 조선에서 약재류를 판매하던 일본인 상인 쓰치다 조스케를 살해한 사건입니다.

 

1895년 4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은, 10월 8일 명성황후를 시해하고(을미사변), 12월 30일 단발령이 공포되고,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 등으로 일제와 친일 관료들에 대한 조선 백성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후 유생들은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기치로 의병들의 봉기가 전국 각지로 확대되었고(을미의병) 조선 정부군이나 일본군과의 전투도 다발적으로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김구는 전 동학 농민군 동지들과 더불어 청나라 북동부 지역의 항일 인사들과 연합 작전을 펼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발걸음을 되돌리게 되었습니다.

 

‘치하포사건’ 은 평안북도 안주에서 ‘삼남의병 봉기’와 ‘단발정지령’에 대한 소식을 듣고 자신의 역할을 찾고자 고향으로 발걸음을 되돌리던 중 발생한 사건입니다. 김구는 1896년 3월 8일 평남 용강군에서 배를 타고 인접한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로 가서 한 여점(여인숙)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침 같은 여점에 있던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를 다음 날인 3월 9일 새벽 3시경에 살해하였는데, 이것이 치하포사건입니다.

무역상인 또는 약장사로도 언급되는 스치다를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 육군중위로 판단한 김구는 그를 타살했다는 포고문과 함께 자신의 거주지와 성명을 써 놓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피신 중이던 김구는 6월 말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인천감리서로 압송되었습니다.


3차례의 진술에서 김구는 스치다 살해 동기와 살해 방법을 밝혔는데, 동기는 ‘국모의 원수에 대한 복수’를 하고 나라의 수치를 조금이나마 씻고자 하는 것이며, 방법은 발로 차 마당에 쓰러뜨리니 그가 칼을 뽑기에 돌로 쳐 넘어뜨리고 칼을 빼앗아 죽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영사 대리는 9월 12일 살인죄로 김구를 참형으로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법부에서는 임금에게 마땅히 상주하여 칙명을 받아야 할 사안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다행히 고종이 참형을 재가하지 않아 김구는 사형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수감 생활을 이어가던 김구는 1898년 3월 19일 탈옥을 감행하여 성공하였고, 아버지가 대신해서 수감되었다가 그로부터 1년 후인 이듬해 3월 석방되었습니다.

 

치하포사건은 을미사변과 갑오개혁, 단발령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 속에서 격화되는 조선인의 반일감정과 투쟁의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라는 명분을 내건 김구의 의거에 대해 조선 정부 및 고종황제의 소극적 처벌 의지는 침략자 일본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김구가 죽인 사람은 일본군인이 아닌 일본 민간인이었으며 고종황제가 김구의 사형을 면제해 주었다는 기록도 없다고 말합니다. 아무튼 죄 없는 사람을, 일본인이라고, 쳐 죽일 정도의 인성을 가진 사람이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겠냐는 논리를 펴는 이들도 있습니다. 

 

역사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김구의 치하포 사건을 다룬 영화 '대장 김창수'. 김창수는 김구의 젊은시절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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