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3월 20일에 일어난 일:
1602년 -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만들어지다.
1654년 - 청나라에서 러시아 정벌을 위해 조선 포수(砲手) 100여 명 지원 요청 (나선정벌의 시작).
1815년 -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해 파리에 도착하면서 100일 천하가 시작.
1946년 - 덕수궁 석조전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1995년 - 옴진리교 신자들이 도쿄 지하철에 사린 가스를 살포하다.
오늘의 묵상: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1946년 3월 20일, 78년 전 오늘, 덕수궁 석조전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가 열렸습니다.
미소공동위원회(US-Soviet Joint Commission)는 1946년 3월 20일부터 1947년 10월 21일까지 한반도의 임시정부 수립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이 개최한 모임입니다. 회의 기간 내내 미국과 소련의 대립, 남한 내 제 정치 세력 간의 갈등 등으로 결국 어떠한 합의도 도출하지 못한 채, 1947년 5월 21일 제2차 위원회까지 열렸으나 결국 아무런 성과 없이 10월 21일 종결되었습니다.
이렇게 미소공동위원회가 무산되면서,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UN 소총회로 이관함으로써 남북의 분단은 가속화되었고 결국 남한과 북한은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
당시 상황을 보자면,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45년 12월에 개최된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미·영·소)에서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최장 5년 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수 있다는 것과(신탁통치를 결정한 것은 아님), 남북 분단으로 인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1946∼1947년 사이에 두 차례 미소공위가 개최되었으나 신탁통치의 의미를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 수립을 위한 수단으로 접근함에 따라 미소공위는 아무런 성과도 없이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 하지만, 만약 우리가 찬탁과 반탁으로 갈라서지 않고, 미국과 소련이 자국의 이익을 조금씩만 양보했더라면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았을까요?
1945년 12월 16-25일: 모스크바 3상회의
1946년 3월 20일: 1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1946년 5월 6일: 1차 미소공동위원회 무기 휴회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의 정읍발언
1946년 7월 좌우합작 운동
1947년 3월 12일: 트루먼 독트린 선언
1947년 5월 21일: 2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1947년 7월 19일: 여운형 암살
1947년 9월 17일: 한국 문제 유엔 상정
1947년 9월 26일: 소련, 미·소 양군의 동시 철군 제안
1947년 10월 18일: 미국, 미소공동위원회의 휴회 제안
1947년 10월 21일: 소련의 대표단 철수로 미소공동위원회 해산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 남북한 총선거 결의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 남한단독 선거 안 가결
'역사속 오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 속 오늘, 3월 22일: 62년 전, 윤보선 대통령 하야 (0) | 2024.03.22 |
---|---|
역사 속 오늘, 3월 21일: 23년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주영 사망 (0) | 2024.03.21 |
역사 속 오늘, 3월 19일: 162년 전, 진주민란의 저항정신 (0) | 2024.03.19 |
역사 속 오늘, 3월 18일: 99년 전,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 탄핵 (1) | 2024.03.18 |
역사 속 오늘, 3월 17일: 54년 전, 정인숙 살해 스캔들 (0) | 2024.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