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4월 22일에 일어난 일:
1500년 - 포르투갈 탐험가 카브랄이 유럽인 최초로 브라질을 발견함.
1917년 - 독립운동가 이상설이 46세의 나이로 사망하다.
2004년 - 북한 룡천역 폭발사고 발생(룡천군 인구의 0.1% 사망, 1% 부상).
2016년 - 전라선 율촌역 무궁화호 탈선 사고 발생(사망 1명, 부상 8명).
오늘의 묵상: 교육자에서 독립운동가로 변신한 이상설
1917년 4월 22일, 107년 전 오늘, 독립운동가 이상설이 46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보재 이상설은 충청북도 진천에서 태어나, 23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25세에 성균관 교수가 되고, 29세에는 '산술신서'라는 한국 최초의 수학 교과서를 편찬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파란만장한 조국의 상황은 그를 교육자로 살지 못하게 했습니다.
1905년부터 대한제국 법부 협판, 의정부 참찬등을 지내던 중,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당시, 조약 체결 결사반대와 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고종에게 올렸다가 12월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자결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했습니다. 그 후 영의정(내각 영문하 총리대신 직무대행)에 임명되었지만 한 달 만에 사직하고, 국권 회복, 애국 계몽 운동에 앞장서게 됩니다.
1906년 봄, 이동녕, 정순만 등과 북간도 용정으로 망명하여, 한국 최초의 항일 민족학교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우고 교장으로서 학생들도 가르쳤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다음 해 문을 닫아야만 했습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을사늑약이 일본 제국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불평등 조약임을 알리기 위하여, 고종의 밀사로 파견됩니다. 그는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 도착했으나, 일제의 계략으로 회의 참석과 발언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 후 7월 14일, 이준은 투숙해 있던 호텔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는데, 이준의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화병에 의한 분사설’, ‘악성 종기 감염설’, ‘자살설’, ‘독살설’, 등 여러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7월 20일 양위식을 강행한 후, 순종을 강제로 즉위시키고 4일 후 한일 신협약을 체결하고, 얼마 후에는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켰습니다. 그 후 일본은 헤이그 특사의 책임을 물어 궐석 재판을 열고 이위종과 (이미 죽은) 이준에게 종신형을 언도했으며, 특사대표 격이었던 이상설에게는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상설은 죽을 때까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서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그는 1908년 미국에서 대한제국의 독립 지원을 계속 호소하는 한편, 8월 콜로라도 주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회의에 이승만과 함께 연해주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1909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국민회를 조직하고, 최초의 독립운동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였습니다. 1910년 8월에 국권이 상실되자, 연해주와 간도 등지의 한족을 규합,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여 한일합병의 반대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11년 연해주에서 권업회라는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고 초대 의사부 의장을 지내고, 1913년에는 사관학교인 대전학교(大甸學校)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을 위한 군 간부들을 양성하였습니다.
1914년 이동휘, 이동녕, 정재관 등과 함께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 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에 선임되었습니다. 하지만 러일동맹이 성립됨에 따라 러시아 정부의 탄압을 받아 광복군 정부는 그 해 9월에 그 모체인 권업회와 함께 더 이상 활동을 하지 못한 채 해체되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권업회와 대한 광복군정부의 핵심 세력들이 주도하여 3월 17일 러시아 연해주에 대한국민의회라는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
1915년에는 상해에서 박은식, 신규식, 조성환 등과 함께 고종을 당수로 추대한 신한혁명당을 조직하여 본부장에 선임됩니다. 그러나 상해 임시정부가 세워지기 2년 전인 1917년 4월 22일, 그는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으로 사망하고 맙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하고, 문고도 모두 불태워졌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하였습니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워라."
- 이상설 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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