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5월 28일에 일어난 일:
1901년 - 이재수의 난 발생.
1937년 - 세계 최대 자동차 제조 기업 중 하나인 폭스바겐이 설립되었다.
1945년 - 나치독일이 멸망했다.
2006년 - 인도네시아 자와 섬에서 지진으로 5,782명 사망, 36,300명 이상 부상.
2014년 - 장성 효사랑요양병원 화재 사고로 21명 사망.
오늘의 묵상: 이재수의 난
1901년 5월 28일, 123년 전 오늘, 제주에서 이재수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이재수의 난'은 1901년 제주도에서 일어난 천주교인과 주민들 간의 충돌 사건으로 천주교도 300여 명이 희생된 사건입니다. 신축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신축민란’, 혹은 '1901년 제주항쟁', '제주신축교난'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제주도의 대표적인 비극인 4.3 사건(1948년) 보다 47년 전에 제주도에 이런 비극이 있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재수의 난'은 4.3 등 제주의 한을 다룬 현기영 작가의 '변방에 우짖는 새'(1983)라는 소설로 알려지기 시작, 이정재와 심은하가 주연한 '이재수의 난'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1999년).
1858년 제주도에 처음 전래된 천주교는 극도로 가난한 지역 주민들의 평등 및 구원 열망에 교세가 급격히 확장됐지만 천주교도들은 탐관오리와 결탁해 온갖 세금을 징수하는 데 앞장서는가 하면 새로운 교당을 지으면서 신목(神木), 신당(神堂)을 없애는 등 토착문화를 말살해 반감을 샀습니다.
또 ‘ 여아대(如我待)’ 패를 가진 프랑스 신부들이 주도하는 교당은 치외법권 지대가 되어 신도들이 온갖 폐악질을 하더라도 교당으로 달아나면 관아에서 체포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아대는 고종이 병인양요에 대한 보상으로 프랑스 신부들에게 하사한 증표로서 이 증표를 가진 사람에게 “왕을 대하듯 하라”는 왕명이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이 증표는 결국 1901년 5월 ‘변방’이었던 제주에서 민란과 천주교도들의 학살을 가져오게 됩니다.
1901년 2월, 제주에서 일부 신도들이 마을 유지인 훈장과 친지들을 잡아 고문하다 죽이고 범인이 교당으로 숨어버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참다못한 대정군수 채구석과 양반 출신 오대현은 4월에 상무사라는 것을 조직해 물리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천주교도들이 상무사 위원 집을 공격했고 상무사들은 보복으로 천주교당을 습격했습니다.
이렇게 민중대표 상무사와 천주교도 양측의 충돌이 격해지며, 무장한 천주교도들에게 주민이 즉사하고 상무사 지도부가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평소 무예가 뛰어났던 이재수는 납치당한 지도부를 대신해 새 지도자로 부상하여 제주성에서 가까운 황사평에 진을 치고 제주관아와 협상을 했습니다.
5월 25일, 이재수의 민군은 성문을 열 것을 요구했지만 프랑스 신부는 나흘간의 빌미를 달라며 시간을 벌면서 인천에 정박한 프랑스함대를 보내달라고 프랑스 공사관에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5월 28일까지 함대는 오지 않았고 민군은 제주성에 입성하여 300여 명의 천주교도를 처형했습니다.
이때 민군에게 죽임을 당한 대다수가 가톨릭을 들먹이며 행패를 저지른 자들이라 끔찍하게 살해당하고 땅에 묻히지 못하고 그대로 썩어나갔습니다. 5월 31일 프랑스함대가 도착하여, 이 배를 타고 온 신임목사(도지사)는 시정을 약속했고 6월 10일 민군은 스스로 해산했습니다.
이재수는 이 민란의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지기로 하고 자수했고, 친우인 강우백이 "너만 죽게 할 수 없다"면서 같이 자수했으며, 이 학살을 지지하던 양반 출신인 오대현도 자수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서울로 압송되어 1901년 10월 9일 최초로 근대식 재판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이 항쟁의 주된 흔적은 민란 지도자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 세 명의 ‘의사’를 기리는 ‘제주 대정 삼의사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비의 뒷면의 새겨진 첫 문장이 충격적입니다: “여기 세우는 이 비는 종교가 무릇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석이 될 것이다.”
[비문]
“여기 세우는 이 비는 종교가 무릇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식이 될 것이다. 1899년 제주에 포교를 시작한 천주교는 당시 국제적 세력이 우세했던 프랑스 신부들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그때까지 민간 신앙에 의지해 살아왔던 도민의 정서를 무시한데다 봉세관과 심지어 무뢰배들까지 합세하여 그 폐단이 심하였다. 신당의 신목을 베어내고 제사를 금했으며 심지어 사형(私刑)을 멋대로 하여 성소 경내에서 사람이 죽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이에 대정고을을 중심으로 일어난 도민 세력인 상무회(象武會)는 이 같은 상황을 진정하기 위하여 성내(城內)로 가던 중 지금의 한림읍(翰林邑)인 명월진(明月鎭)에서 주장인 오대현(吳大鉉)이 천주교 측에 체포됨으로써 그 뜻마저 좌절되고 만다. 이에 분기한 이재수(李在守)·강우백(姜遇伯) 등은 2진(二鎭)으로 나누어 성을 돌며 민병을 규합하고 교도들을 붙잡으니 민란으로 치닫게 된 경위가 이러했다.
규합한 민병 수천명이 제주시 외곽 황사평(黃蛇坪)에 집결하여 수차례 접전 끝에 제주성(濟州城)을 함락하니 1901년 5월 28일의 일이었다. 이미 입은 피해와 억울함으로 분노한 민병들은 관덕정(觀德亭) 마당에서 천주교도 수백 명을 살상하니 무리한 포교가 빚은 큰 비극이었다.
천주교측의 제보로 프랑스 함대가 출동하였으며 조선 조정에서도 찰리위사(察理衛使) 황노연(黃耆淵)이 이끄는 군대가 진입해 와 난은 진압되고 세 장두는 붙잡혀 압송되어 재판과정을 거친 후에 처형되었다. 장두들은 끝까지 의연하게 제주 남아의 기개를 보였으며, 그들의 시신은 서울 청파동 만리재에 묻었다고 전해 오나 거두지 못하였다. 대정은 본시 의기 남아의 고장으로 조선 후기 이곳은 민중봉기의 진원지가 되어왔는데, 1801년 황사영(黃嗣永)의 백서사건으로 그의 아내 정난주(丁蘭珠)가 유배되어 온 후 딱 100년 만에 일어난 이재수 난은 후세에 암시하는 바가 자못 크다.
1961년 신축년에 향민들이 정성을 모아 제주 대정군 삼의사비(濟州大靜郡 三義士碑)를 대정고을 홍살문 거리에 세웠던 것이 도로 확장 등의 사정으로 옮겨 다니며 마모되고 초라하여 이제 여기 대정고을 청년들이 새 단장으로 비를 세워 후세에 기리고자 한다. “
한편, 이 민란으로 목숨을 잃은 천주교도들의 무덤은 이재수와 민란참가자들이 진을 쳤던 황사평에 위치해 있습니다. 프랑스 교단 쪽이 피해보상으로 금전적 보상 이외에도 이곳을 달라고 요구해 천주교도 희생자들의 집단묘역을 만든 것으로 '순교자 묘역'이라고 새겨진 커다란 돌이 있습니다.
과연 이들이 '순교자'이며, 민란을 주도한 자들 또한 '의사'라면 누구의 잘못으로 수많은 생명을 잃게된 것인가요?
2003년 들어 천주교 측과 '1901년 제주항쟁기념사업회'는 서로 화해했다고 합니다. 천주교 측은 서구제국주의의 한국침략기에 선교과정에서 “제주 민중에 대한 과거의 잘못에 사과”했고 '1901년 제주항쟁' 측은 봉건왕조와 외세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인명 살상의 비극을 초래한 데 대하여 사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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