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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역사 속 오늘, 9월 6일: 47년전, 코리아게이트 로비스트 박동선 기소

해양맨 2024. 9. 6. 00:00

 

역사 속 오늘, 9월 6일에 일어난 일: 

1945년 -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 대표자회의에서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발표
1950년 - 대한민국 국군, 여군 창설
1970년 - 팔레스타인 인민 해방 전선, 유럽 상공에서 뉴욕행 민간 여객기 4대를 납치
1977년 - 코리아게이트: 미국 법무부, 의회 로비 활동과 관련 박동선을 수뢰혐의로 기소
1981년 - 경상남도 통영 근해서 제1영산호가 화물선과 충돌하여 침몰, 선원 18명 실종
2022년 - 태풍 힌남노가 부산에 상륙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14명 사망)

 

오늘의 묵상: 코리아게이트와 박동선

1977년 9월 6일, 47년 전 오늘, 미국에서 의회 로비 활동과 관련하여 박동선을 수뢰혐의로 기소했습니다.

 

1975년 6월 도널드 프레이저 의원에 의한 하원의 한국에 대한 인권청문회에서 전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던 이재현이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미국 내에서 반한파(反韓派)에 대한 인권탄압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내에서 반박정희 여론과 활동을 무마하기 위해 대규모 회유, 매수, 협박, 공작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였습니다.

 

1976년 10월 24일, 워싱턴 포스트는 10면에 걸쳐 "박정희의 지시로 재미 한국인 사업가 박동선과 중앙정보부 등이 미국 상·하원 및 공직자들에게 매년 50만 달러에서 1백만 달러에 이르는 불법 로비를 했다"라고 보도했습니다.

 

뉴욕 타임스는 115여 명의 상·하원의원들이 연루됐을 것이라 주장했고, 하워드 베이커 상원의원은 최소 50여 명이 뇌물 수수와 연관되어 있다고 추정했습니다. 이 정치 스캔들을 '박동선 사건' 혹은 '코리아게이트 (Koreagate)'라고 부릅니다.

 

한편, 1977년 6월, 3선 개헌 당시 박정희에게 토사구팽 당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하여 박정희 정권의 불법 로비현황과 인권 범죄들을 증언했습니다.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 프레이저 청문회 출석, 심지어 박정희 정권의 치부를 정리한 회고록 등은 박정희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배신 행위였습니다. 결국 김형욱은 1979년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을 만나기 위해서 프랑스 파리로 떠난 뒤 행방불명 되었습니다.

1977년 9월 1일, 미연방 대배심원은 박동선을 뇌물 제공과 선거자금 불법 제공 등의 혐의로 기소하고, 9월 6일에는 로비스트 김한조도 위증과 매수음모라는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한미 양국은 박동선의 자유의사에 따라 미국 의회 조사위원회에서 증언하도록 합의하여 박동선은 1978년 2월부터 9월 사이 세 차례에 걸쳐 미 의회에서 증언을 했습니다. 

 

1978년 4월 3일 미 하원 윤리위의 공개증언에 앞서 선서하는 박동선. /연합뉴스.

 

미국 시민권자로 화장품 사업으로 성공한 김한조는 로비스트 박동선과 함께 한국 정보기관의 지원을 받고 미국 정·관계 인사들을 매수한 혐의로 유죄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의회 증언을 하고 실형을 면한 박동선과는 달리 김한조는 이를 거부해 1979년 7~11월 미국 교도소에서 복역했습니다. 이후 김한조는 부인과 이혼하고 1981년 한국으로 귀국해 혼자 살다가 2012년 7월 생을 마감했습니다. 김한조는 자서전 <코리아게이트>(1996)에서 “내가 보여주었던 애국심을 정부와 우리 국민이 높이 평가해 모든 국민의 애국심으로 연결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조국에 돌아온 뒤 모함과 멸시, 무관심 혹은 외면으로 지내왔다”라고 불만을 토로한 바 있습니다.

 

결국 사면을 조건으로 청문회에 출석한 박동선은 32명의 의원에게 85만 달러 상당의 선물을 제공했다고 인정했지만, 자신이 스스로 조국을 위해 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기소는 면했으나, 60년대 말 쌀 중개 커미션의 탈루세금 1500만 달러를 추징당했습니다.

 

제2의 워터게이트’로 불린 이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미 정보기관의 청와대 도청이 드러나고 한국 정보요원 두 명이 미국에 망명을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123명의 미국 정치인·관료들이 소환되고 1563명이 참고인 진술을 했지만 결국 미국 현직 의원 1명만 뇌물수수로 유죄 판결을 받고 7명이 의회 차원에서 가벼운 징계를 받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정책이 촉진됐고, 한미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들어섰습니다. 사실 한국정부가 박동선을 통해서 로비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주한미군 철수를 비롯하여 한국군 현대화 계획을 위한 군사원조를 받으려면  미 의회의 예산 승인이 있어야 하므로 이에 미국 의회를 설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박동선은 '코리아게이트 이후에도 활동을 계속해 2005년 미국 쌀을 이라크에 넘기고, 저가의 이라크 석유를 구입한 스캔들에 휘말려 미 연방법원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는 2008년 9월 조기석방돼 한국에 들어와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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