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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역사 속 오늘, 12월 15일: 53년 전, 당시 사상최대 해난참사 남영호 침몰

해양맨 2023. 12. 15. 00:00

역사 속 오늘, 12월 15일에 일어난 일:

1950년 - 한국전쟁, 흥남 철수 작전 시작.

1955년 - 북한에서 박헌영이 사형을 선고받다.
1961년 - 이스라엘 법정이 나치 독일 전범 아이히만에게 교수형을 선고함.
1970년 - 남해안에서 남영호 침몰 사고로 326명 사망.
2011년 - 국방과학연구소가 중거리 지대공유도무기 천궁을 독자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
2014년 - 콩고 탕가니카 호수에서 선박이 전복돼 130여 명이 사망하였다.


오늘의 묵상: 남영호 침몰 사고

1970년 12월 15일, 53년 전 오늘 남해안에서 남영호가 침몰하였습니다.

 

1970년 12월 14일 오후 5시경 제주도 서귀포 서귀항에서 출항한 부산~제주를 잇는 정기 페리인 남영호가 다음날인 12월 15일 침몰해 326명의 사망자를 냈습니다. 대한민국의 해상 참사 사망자 수 2위, 6.25 전쟁을 제외하고 사망자 수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502명 사망, 6명 실종)와 창경호 침몰 사고(330명 사망)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참사입니다.

 

1970년 12월 16일자 한국일보 1면 기사.

 

사고 당시 남영호는 성산항에 들러 승객과 화물을 추가로 더 싣고 총정원이 321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승객 318명과 선원 20명 등 338명을 태워 정원을 초과한 상태였습니다. 거기에다 화물은 무려 540톤이나 실어서 적재 허용량을 4배 이상 초과한 상태였습니다. 선박회사 측은 3개의 화물창고가 모두 감귤 상자로 채워지자 선적이 금지된 앞 화물창고 덮개 위에 감귤 400여 상자를 더 쌓았고 중간 갑판 위에도 감귤 500여 상자를 더 실어 서귀항을 출항할 때부터 이미 선체의 중심이 15도쯤 기울어있던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후 남영호가 성산항을 떠난 지 5시간 25분이 지난 15일 새벽 1시 15분, 전남 여수에서 동남쪽으로 28마일(약 52km) 떨어진 해상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심한 바람이 남영호의 우현 선체에 몰아쳤습니다. 이때 갑판 위에 쌓아놓은 감귤 상자가 좌현 방향으로 쏟아지며 이 순간 중심을 잃은 선체가 좌현으로 넘어가며 침몰하기 시작했습니다.

 

생존자들은 영하의 겨울 바다 위에서 뒤집힌 배에 매달렸고, 배가 가라앉자 빈 귤상자를 붙들었지만 구조대는 12시간이 지나서야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해안경찰대에서 3명을 구조하였고, 일본 어선으로부터 인계된 8명과 한국 어선에 구조된 1명을 포함하여 생존자는 모두 12명이 전부였습니다.

 

부산~제주를 잇는 정기 페리인 남영호.

 

검찰은 과적과 화물의 편중 적재, 기관 고장, 선장이 승선하지 않았음을 사고의 원인으로 보았고, 조타수가 선장이었으며  선박은 기관 고장 후 표류하다 사고가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국회 남영호 침몰사건 진상조사 특별위원회는 승객 명부에 등재되지 않은 79명의 승객이 있었고, 과적이 상습적으로 묵인되어 왔으며, 시정 요청이 있었으나 조치되지 않았음을 들어 당국의 감독 소홀로 인한 초과 승선과 과적을 사고의 원인으로 결론지었습니다.

 

적재량을 초과한 과적, 항해 부주의, 신속하지 못한 대처 등 전형적인 인재(人災)로 큰 피해를 입었던 남영호 침몰 사고 이후에도 많은 해상사고가 일어났었지만 여전히 안전불감증에 빠져 있던 대한민국은 44년 후 '세월호'의 비극(299명 사망, 5명 실종, 6천억 원 이상 피해)을 당하게 됩니다. 

 

'이번 세월호 침몰 사고는 우리 역사에 지우기 힘든

아픈 상처로 기록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사고를 계기로 진정한 안전 대한민국을 만든다면

새로운 역사로 기록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2014년 5월 19일 세월호 참사 대국민 담화)

 

기억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되지만, 기억으로만 그치는 역사도 반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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