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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역사 속 오늘, 3월 4일: 브라운 각서와 베트남 추가파병

해양맨 2024. 3. 4. 00:00

역사 속 오늘, 3월 4일에 일어난 일:

1461년 - 장미 전쟁: 헨리 6세가 물러나고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오르다.
1824년 -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선거인단 수와 총 득표 수에서 모두 뒤졌던 애덤스가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하다.
1942년 - 싱가포르에 거주하던 10만여 명의 중국인 화교들이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숙칭 대학살' 종료.

1966년 - 브라운 각서 체결로 한국군의 베트남 추가파병 합의.

 

오늘의 묵상: 브라운 각서

1966년 3월 4일, 58년 전 오늘, 브라운 각서로 한국군의 베트남 추가파병이 결정됐습니다.

 

브라운 각서(Brown Memorandum)는 한국군의 베트남 추가파병에 대한 미국 측 보상조치를 약속한 16개항의 문서로서, 주한미국 대사 W. G. 브라운이 1966년 3월 4일에 서명하여 이동원 외무부 장관에게 보낸 서신으로 3월 7일 한국정부에 전달됐습니다.

 

정식 명칭은 《한국군 월남 증파에 따른 미국에 대한 협조에 관한 주한 미대사 공한》으로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파병 상한선은 5만 명 이내로 한다.
  2. 한국군의 현대화를 지원한다.
  3. 북한의 침공 시 미국이 즉각 출병하도록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개정한다.
  4. 베트남에서 사용할 군수품 공급 등 한국의 남베트남 시장진출을 보장한다.

한국군의 베트남 추가 파병에 대한 미국의 보상을 약속한 브라운각서 원본.

 

베트남 전쟁은 1955년~1975년까지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46년부터 1954년까지 프랑스군과 베트민(남북으로 갈리기 전) 사이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해서 정통성이 없었던 박정희 군사정부는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여러 차례 베트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1961년 11월에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직접 미국을 방문해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남베트남을 돕기 위해서 최소 3개 사단을 파병하겠다는 의사를 강력하게 피력했습니다. 당시 케네디는 이 제안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월남전 상황이 악화되면서 미국의 입장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1963년 11월 22일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린든 B. 존슨은 베트남 중립화보다는 군사행동 강화를 해결책으로 판단하고 미국의 동맹국들에게 베트남 전쟁 참여를 독려합니다. 한국정부는 미 국무부의 비전투부대 파병 요청을 받아들여 1964년 9월, 130명의 이동외과병원 요원과 10명의 태권도 교관을 1차로 파병하게 됩니다. 이후 1965년 3월, 2,000명 규모의 공병대 등 비전투 병력을 '비둘기 부대' 명칭으로 파병했습니다.

 

1965년 5월 16일, 존슨 대통령은 박정희를 미국으로 초청해 성대한 퍼레이드까지 해주며 한국군의 전투병력 1개 사단을 파병해 줄 것 요청했습니다. 존슨 대통령은 그 대가로 주한미군 유지와 감축 시 협의할 것, 그리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을 위한 특별지원까지 약속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방미 분위기를 전한 1965년 5월 18일 동아일보 사진 기사.


이렇게 8년 동안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은 모두 6차례에 걸쳐 32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이 가운데 5,099명이 사망했고 11,232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또한 미군이 살포한 정글 제초용 고엽제 후유증으로 파병 군인의 절반에 해당하는 약 16만 명이 죽거나 아직까지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베트남 파병의 대가로 획득한 10억 달러 이상의 외화는 제2차 경제개발계획의 목표를 훨씬 초과한 연평균 12% 성장을 이룰 수 있었으며, 군 장비 현대화에도 큰 몫을 하였습니다. 한국의  베트남 파병은 미국 대신 전쟁을 치렀다는 비판도 받고 있지만, 주한미군이 베트남전쟁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 미국과 한국의 우호를 돈독히하고, 월남전 특수로 한국 경제가 큰 혜택을 누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의 피값이, 그리고 전쟁통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힘들게 벌어들인 외화가  개인의 영욕이나 정권 유지를 위한 헛된 자금으로 쓰이지 않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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