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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역사 속 오늘, 4월 3일: 76년 전, 제주 4·3 사건

해양맨 2024. 4. 3. 00:00

역사 속 오늘, 4월 3일에 일어난 일:

1922년 -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이 초대 서기장으로 부임했다 (1953년 5월 3일까지 역임).

1948년 - 제주도에서 남로당이 경찰서를 습격하면서 제주 4·3 사건이 시작되다.

1974년 - 유신정권 시기,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했다.
2008년 - 2007년 강화 총기 탈취 사건의 조영국 피고인에게 1심 군사법원이 사형을 선고했다.
2009년 - 뉴욕 빙엄턴에 있는 미국시민권협회에서 총격 사건이 일어나 13명이 죽고 4명이 부상했다.

 

오늘의 묵상: 제주 4·3 사건

1948년 4월 3일, 76년 전 오늘, 제주도에서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이 경찰서를 습격하면서 제주 4·3 사건이 시작되었습니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여에 걸쳐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정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로 참혹한 민간인 대학살을 초래한 한국 현대사에서 6·25 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컸던 슬픈 역사입니다.

 

사건의 시작은 1947년 3·1절 기념 제주도 대회에서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남로당이 선동하여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총파업에 동조하였습니다. 그러자 미군정은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을 모두 외지인으로 교체하고, 응원경찰과 극우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원 등을 대거 제주로 파견해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벌이게 됩니다.

 

빨갱이를 잡는다는 구실로 검속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고, 서북청년회(서청)는 테러와 횡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했고, 구금자에 대한 경찰의 고문이 잇따랐습니다. 그러던 중 1948년 3월 일선 경찰지서에서 세 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해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해갔습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총성과 함께 한라산 중허리의 오름마다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350명의 무장대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반대단독선거 반대를 내세우며, 이날 새벽 12개의 경찰지서와 서청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습니다.

무장봉기가 발발하자 미군정은 경찰력증파를 통해 사태를 막고자 했으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군대에 진압출동 명령을 내렸습니다. 당시 국방경비대 제9연대의 김익렬 중령은 경찰과 도민의 갈등으로 발생한 사건에 군이 개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4월 말 무장대 측 책임자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맺으려 했으나 결렬되며 제9연대장은 교체되었습니다. 미군정은 제20 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제주에 파견하여 5.10 선거를 추진했습니다.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선거가 실시됐으나 제주도의 세 개 선거구 가운데 두 개 선거구가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습니다. 제주도가 남한에서 유일하게 5.10 선거를 거부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면서 5.10 선거 후 정부의 강도 높은 진압작전이 전개됩니다.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 문제를 뛰어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어,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습니다.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이 포고령은 소개령으로 이어지면서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됐습니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중산간 지대는 초토화의 참상을 겪게 됩니다.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빨갱이 소탕을 빌미로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습니다. 중산간 지대에서 뿐만 아니라 해안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희생되었습니다. 4개월 동안 진행된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방화되었고, 마을 자체가 없어져버린 이른바 ‘잃어버린 마을’이 수십 개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하고, 1949년 6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습니다.

그러나 6 · 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으로 희생되었고,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 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 됐습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 4.3 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됩니다.

2000년 8월 28일 ‘제주 4.3 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를 거쳐 2003년 10월 정부의 '제주 4.3 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이후 대통령의 공식 사과와 4.3 평화공원 등이 조성되었습니다.

진상보고서에 의하면, 4.3 사건의 인명 피해는 25,000∼30,000명으로 추정되고, 강경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습니다.

 

제주 4.3 항쟁 민간인 및 가해자 인명 피해자 통계. 2001년 4.3사건위원회 신고서.

 

제주4.3 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약칭 : 4.3위원회)가 확정한 희생자 수는 2023년 현재 14,738명이다. 이는 공식적으로 집계된 희생자 수치일 뿐, 진상조사보고서는 4.3 당시 인명피해를 2만 5,000명에서 3만 명으로 추정한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4.3 사건으로 인해 제주지역 공동체는 파괴되고 엄청난 물적 피해를 입었으며, 무엇보다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참혹한 인명피해를 가져왔습니다. 2000년 1월 4.3 특별법 공포 이후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21세기를 출발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제주도는 2005년 1월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제주 4.3 평화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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