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4월 7일에 일어난 일:
1805년 -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이 빈에서 초연되었다.
1896년 -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신문 날'로 제정(1957년).
1945년 - 제2차 세계대전 일본 야마토 전함 침몰.
1992년 - 보스니아 내전 발발.
오늘의 묵상: 독립신문과 서재필
1896년 4월 7일, 128년 전 오늘, 독립신문이 창간되었습니다.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의 전신인 독립문 건립 추진 위원회에서 창간한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으로 순한글 3면, 영문 1면으로 구성됐습니다. 영문판을 만든 이유는 조선의 실정을 외국에 알려 조선의 독립을 이루려는 목적이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신문은 1883년 10월 31일에 만든 《한성순보》이지만 이것은 국가에서 만든 것이고, 사실 《독립신문》도 정부에서 4400원의 지원금을 받았지만, 정부가 운영에 개입하지 않았으므로 민간 신문으로 분류합니다.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 서재필의 미국 이름)이 사장을 맡았고, 주요 필진으로 유길준, 윤치호, 이상제, 주시경 등이 있었습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의 논설이나 각종 기사를 자신이 직접 썼으며, 특히 논설을 중요시하였는데, 그것은 이를 통해 사회 전반에 근대 사상과 제도를 소개하여 국민을 계몽하려던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립신문은 처음에 주 3회 300부 발행하다가, 1897년 1월 5일부터 영문판을 4면짜리 The Independent로 분리했으며, 1898년 7월 1일부터는 일간으로 바꾸었습니다. 독립신문은 최초의 순한글판으로서 한글에 띄어쓰기를 정착시킨 신문이기도 합니다 (이전까지는 한글을 쓸 때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활동이 점점 정치화되고, 좋았던 정부와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서재필은 결국 미국으로 추방되고 윤치호가 독립신문의 운영을 이어받게 됩니다. 이때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일본에 팔아넘기려고 시도했으나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서재필의 친일 논란이 문제가 되면서 독립신문 창간일을 기념해 만들어진 '신문의 날'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신문의 날은 서재필 개인이 아니라 독립신문 창간을 기념하는 날이며, 독립신문은 최초의 민간지로서 개화사상과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류가 되고 있다."라는 의견을 존중하여 오늘을 신문의 날로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독립신문은 독립협회가 해체당하고 서재필의 미국 망명 이후, 윤치호, 헨리 아펜젤러 등이 잠시 맡았으나, 그 후 정부에서 인수한 뒤 1899년 12월 4일 폐간되었습니다.
서재필 (미국명 필립 제이슨)
서재필(1864년 1월 7일 ~ 1951년 1월 5일)은 조선의 문신, 대한제국의 정치인·언론인, 독립운동가입니다. 또한 그는 필립 메이슨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에서 병리학자·의사·시인·소설가로 활동하였습니다.
서재필은 1864년 1월 7일 전남 보성 외가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그의 고향은 충남 논산입니다. 그의 어머니인 친정인 보성에서 그를 낳았으므로 보성이 그의 생가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가 서울로 가기까지 성장한 곳은 논산이었고, 7살 때 서울로 올라와 한학을 배운 뒤 1882년 과거(별시문과 병과)에 최연소로 급제했습니다.
그 무렵 서재필은 서광범을 비롯해 김옥균·홍영식·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며 개화사상에 눈을 뜨게 됩니다. 임오군란으로 신식 군대의 필요성을 느낀 김옥균은 기골이 장대한 서재필에게 일본 도야마 육군 하사관학교에 유학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1년간 수학한 뒤 1884년 7월 귀국해 고종에게 사관학교 설립을 주청 했습니다. 그해 12월 급진 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킬 때, 서재필은 일본에서 함께 공부한 조선인 생도와 조선에서 그가 조련한 사관들을 이끌고 행동대장으로 참여했습니다.
갑신정변의 쿠데타 후 그 공으로 서재필은 불과 20살의 나이에 병조참판(국방부 장관)에 올랐으나 청나라가 개입해 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났고, 서재필을 비롯한 박영효, 서광범, 김옥균 등의 주역들은 역적이 됐습니다. 서재필은 김옥균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그의 생부와 아내는 자살하고 아들은 돌봐주는 이가 없어 굶어 죽었습니다. 생모는 노비가 됐으며 형제들도 처형되거나 옥에 갇혔습니다.
조선이 일본에 쿠데타 주역들의 인도를 요구하자 서재필은 서광범·박영효와 함께 미국행 배를 타고 1885년 6월 11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습니다(1차 망명). 이곳에서 그의 인생 제2막을 열며 그는 미국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한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1890년)이며 한인 최초의 양의사(1893년)가 된 필립 제이슨은 미국 명문가의 딸과 재혼하며(1894년) 미국 주류사회 정착에 성공하게 됩니다.
1894년(고종 31년) 김옥균이 암살되어 부관참시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서재필은 조선 조정과 조선 민중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증폭되었습니다. 그런데 그해 6월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조선에서는 개화파 인사들에 대한 복권 여론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갑오개혁으로 갑신정변 당시 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지자, 서재필은 1895년 법무대신 서광범의 건의로 중추원 고문으로 초빙되어 귀국하였습니다(1차 귀국).
그 후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고 그해 7월 독립협회를 설립했습니다. 이후 독립협회를 통해 토론회와 강연회, 상소 활동, 집회 및 시위 등을 주도했고, 민주주의와 참정권을 소개하고, 신문물 견학을 위한 외국 유학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그는 무보수로 배재학당에 출강해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김규식 등의 젊은이들에게 세계사를 강의하면서 자유 민주주의와 참정권, 인권 개념, 사회 계약론 등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서재필은 당시 조선의 모든 것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갑신정변의 실패에 크게 좌절했고 이를 역적시하는 고종 등의 태도나, 일가족이 처참하게 희생된 것, 일본 망명 중에 조선 조정에서 자신을 암살할 자객을 보낸 것 등으로 조국에 대한 원한과 증오심이 가득했습니다. 모든 친척들을 냉대했으며, 전처나 생모의 묘소에도 가지 않았고, 양복 차림으로 안경을 끼고 입궐하였으며(왕 앞에서는 도수가 있는 안경일지라도 벗는 것이 예의였음), 입궐한 뒤에 고종의 앞에서 절하지 않은 채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악수를 청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더 이상 조선의 백성이 아닌 미국 시민권자였습니다. 그는 귀국 후 단 한 번도 자신을 서재필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고, 자기 이름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 또는 제이슨(Philip Jason), 피제손으로 지칭하였습니다.
1897년 11월 20일 청나라 사신을 맞아들이던 영은문을 헐고 그 맞은편에 서재필과 독립협회의 주도로 '독립문'이 세워졌습니다. 독립협회가 기금을 모아 완공한 독립문은 서재필이 가지고 있던 화첩 중에서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그 규모를 축소하되 모양만은 똑같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독립문 현판은 서재필의 권유로 이완용이 썼습니다.
그 후 노비제도 폐지 등의 개화사상을 견제하던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그는 1898년 5월 미국으로 추방되어(2차 망명) 미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필라델피아에서 해부학 강사와 병리학 연구원으로 일하게 됩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해, 재정적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문구 및 인쇄 사업을 하는 '디머 앤 제이손' 상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그 후 필라델피아에서 1924년까지 인쇄업과 각종 장부와 사무실용 가구 등을 파는 필립 제이슨 상회를 운영했습니다
그는 재미 한국인 지도자로서,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1919년 3.1 운동 이후에는 자신이 운영하던 문구점과 가구점이 파산할 만큼 생계 곤란을 겪었습니다. 그는 구미위원부와 한국친우회 등을 통한 독립운동에 재산을 다 써버려 예순이 넘은 고령으로 생계를 위해 다시 본업인 의사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1924년 5월 유일한이 류한주식회사(유한양행의 전신)를 설립하고 서재필을 초대 사장으로 추대하여 그는 2년 6개월 동안 류한주식회사의 사장을 지냈습니다. 1926년 유일한이 귀국 전 서재필에게 인사를 갔을 때, 서재필은 조각가인 자기 딸이 만든 버드나무 목각화를 유일한에게 선물로 주었는데 이것이 유한양행의 상표가 되었습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승리가 조선의 해방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77세에 미군 징병검사관으로 자원봉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광복 후 1947년 7월 미군정 사령장관 존 하지 등의 요청으로 귀국하여(2차 귀국) 미군정과 남조선과도정부의 최고고문 역을 하였습니다. 한때 그를 대통령 후보자로 추대하려는 운동이 있었으나 사양하고 1948년 8월 미국으로 출국하여 1951년 1월 후두암과 방광암, 과로의 합병증으로 87세를 맞기 이틀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977년 12월 13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 되었습니다. 1990년 서울 독립문 옆에 동상이 세워졌고, 생가가 있는 전남 보성과 만년을 보낸 필라델피아에 각각 서재필기념관이 있습니다. 2008년 5월 미국 워싱턴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고 워싱턴시는 5월 6일을 ‘서재필의 날’로 지정했습니다. 서재필 동상 초석 정면에는 '최초 한국계 미국인―한국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개척자'라고 씌어 있습니다.
1994년 4월 4일 독립운동가 서재필(1864~1951, 향년 86세)의 유해가 한국으로 봉환되어 4월 8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그가 미국 땅에 가족과 함께 묻히는 것은 그 스스로가 선택한 일이었으며, 여러 차례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여생을 고국에서 보낼 기회가 있었지만 번번이 거부하고 자기가 선택한 미국 시민으로 살다가 죽은 이의 유해를 굳이 한국으로 옮겨온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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