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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역사 속 오늘, 4월 15일: 105년 전, 일제의 제암리 학살 사건

해양맨 2024. 4. 15. 00:00

역사 속 오늘, 4월 15일에 일어난 일:

1919년 - 3·1 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의 제암리 학살 사건 발생.
1999년 - 대한항공 화물기 6316편 추락 사고.
2002년 - 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 사고 (129명 사망, 37명 부상)
2013년 - 미국 보스턴 마라톤에서 테러가 발생하다.
2019년 -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오늘의 묵상: 제암리 학살 사건

1919년 4월 15일, 105년 전 오늘, 3·1 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의 제암리 학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교회에서 일본 제국 육군 헌병 중위의 주도로 발생한 학살사건으로 주민 29명이 사망하고 민가 30여 채가 불에 탔습니다.

 

1919년 4월 15일 제암리 참변 현장.

 

1919년 3월 1일에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난 얼마 뒤인 3월 31일 장날, 제암리에서 가까운 발안장터에서 약 1,000명의 인근 주민이 모인 가운데, 태극기를 세워 놓고 독립 연설회를 개최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장거리를 행진하였습니다. 이때 시위를 진압하던 일본 경찰이 위협사격을 가하자 군중들은 투석으로 대항했는데, 이 과정에서 주민 3명이 칼에 맞아 사망하고 제암리 교회 교인 등 많은 이들이 수비대에 붙잡혀 고문을 받고 풀려 났습니다.  

이날 이후 주민들이 밤마다 뒷산에 올라 봉화를 올림으로써 만세운동은 계속됐습니다. 때문에 그곳에 살고 있던 일본인 부녀자와 어린이는 조금 떨어져 있는 삼계리로 피신하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3월 말을 전후로 만세 시위 운동이 맹렬히 일어나자, 몇 개의 일본군 검거반이 파견되면서 3.1 운동에 대한 보복 행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제암리에서는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고, 다만 마을 사람 중 일부가 발안장터의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1919년 4월 15일 오후, 일본군 보병 중위 아리다 도시오가 이끄는 보병 11명과 순사 2명이 제암리에 도착하여, 강연이 있다고 속여 기독교와 천도교 남자 신자 20여 명을 기독교 교회당에 강제로 모이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돌연 출입문과 창문을 굳게 잠그고, 안에 있는 사람들을 총칼로 학살한 뒤,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교회당에 불을 질렀는데 불길이 5시간쯤 타올랐습니다. 이때 일본군은 불속에서 뛰쳐나오거나 길에 나왔다가 달아나는 사람에 대해 발포하거나 총검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이어 팔탄면 고주리로 향하여 김흥렬 일가족 6명을 포박하고, 짚단과 나무로 덮어 석유를 뿌려 생화장을 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교회당 안에서 23명, 밖에서 6명 등 모두 29명이 살해되었고, 일본군경이 지른 불로 민가 31호가 불타버렸습니다. 현장을 목격한 생존자 전동례김순이의 증언에 따르면, 마을 사람들이 예배당에서 희생된 이들의 유해를 거두어 발안 장터 뒷산에 묻었다고 합니다.


한편 제암리 학살사건의 현장 지휘책임자인 보병 제79연대 소속 아리다 중위에 대한 처벌은 행위가 직무 집행상 온당하였다는 이유로 덮어두려고 하였다가, 세계 여론의 지탄을 받게 되자 7월 17일 자로 군법회의에 부쳐졌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1938년 재건된 제암교회 (1969년 사진).

 

제암리 3.1운동 순국 기념탑 모습. 해방되기 전까지 제암리 사건은 언급조차 못 되다가 1959년 4월이 되어서야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로 된 순국 기념탑을 세울 수 있었다.

 

제암리 학살사건의 최후 증인인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에 따라 1982년 9월 발굴 작업이 진행됐고 23위의 유골을 수습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남편일지도 모르는 한 유해의 정강이뼈 부근을 쓰다듬으며 끝없는 눈물을 흘렸다' (동아일보 1982년 9월 25일자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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