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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역사 속 오늘, 6월 9일: 37년 전, 이한열 최류탄 피격

해양맨 2024. 6. 9. 00:00

역사 속 오늘, 6월 9일에 일어난 일: 

1863년 - 미국 남북전쟁 중 게티즈버그 전역: 브랜디 역 전투
1942년 - 체코슬로바키아의 리데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파괴되다.
1983년 - 단식 농성을 벌이던 김영삼이 건강악화로 단식농성을 21일 만에 종료하였다.
1987년 -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1991년 -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 폭발로 140여 명 사망.

오늘의 묵상: 이한열과 6월 항쟁

1987년 6월 9일, 37년 전 오늘,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전경이 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7월 5일 만 20세의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이 사건은 6월 항쟁과 6.29 선언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이한열은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2학년 재학 당시,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6월 9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개최하기로 한 ‘박종철 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국민대회’를 하루 앞두고 열린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서 전경이 쏜 최루탄을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최루탄에 피격당한 후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모습. 이 사진은 로이터 통신의 정태원 사진 기자가 촬영하였고 중앙일보와 뉴욕 타임스 1면 머릿기사에 실렸다. AP통신이 선정한 20세기 100대 보도 사진에 선정되었다.

 

수사 과정을 거쳐 검찰은 최루탄 사고 당시 SY44탄을 발사한 전경이 「최루탄 취급 요령」이라는 경찰교범에 나오는 안전 사각 35~45도를 어기고 발사각도를 낮춰 쏨으로써 이한열을 사망케 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러나 현장 지휘를 맡았던 서장, 중대장, 소대장 등 경찰 간부들에 대해서는 직무유기의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며 무혐의로 불기소 처분하였습니다. 총류탄을 발사해 이한열을 사망에 이르게 한 당사자는 특정하지 못하였고, 서울지방검찰청은 1987년 8월 3일 불상의 전경대원을 살인죄로 기소중지 처분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전두환 정권의 잔인성에 대해 전 국민적인 분노를 이끌어 내었고 6월 항쟁이 걷잡을 수 없이 격해지며 결국 군사정권의 항복 선언인 6.29 선언을 이끌어내게 되었습니다.

 

서울 연세대학교 한열동산 이한열 기념비. 1987년 6월9일 최류탄에 맞고, 7월 5일 사망, 7월 9일 민주국민장을 치르니 그의 나이 22세였다. 198769757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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