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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역사 속 오늘, 6월 18일: 71년 전, 반공포로 석방 사건

해양맨 2024. 6. 18. 00:00

역사 속 오늘, 6월 18일에 일어난 일: 

  618년 - 당나라 중국 재통일.
1812년 - 미영전쟁 발발.
1815년 -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전하면서 나폴레옹 전쟁이 종결.
1953년 - 이승만 정부에서 반공포로 석방 사건이 일어났다.

 

오늘의 묵상: 반공포로 석방 사건

1953년 6월 18일, 71년 전 오늘, 이승만 대통령이 '통일 없는 정전'에 반대하며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했습니다.

 

반공포로 수용소를 시찰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수행원들. 포로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열렬히 환영하고 있다.

 

6.25 전쟁의 휴전협정이 진행 중이던 1953년 6월 18일 대한민국 각지에 수용되어 있던 북한, 중국 출신 포로 중 반공 성향 포로를 석방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미국은 6.25 전쟁의 휴전을 맺으려고 했으나 이승만은 휴전에 반대하고 있었고 아무런 안전보장 장치 없이 휴전이 이루어지면 이후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승만이 미국을 압박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 '반공포로 석방 사건'입니다.

이 사건 이후 이승만은 미국에 휴전협정 전 안전보장 약속을 해 줄 것을 요구했고 실제로 휴전협정이 맺어지기 보름 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것이라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당시 포로의 수용과 감시는 UN군 측에서 맡고 있었고 당연히 UN군은 포로들을 수용소에 안전하게 가둬 둘 의무가 있었습니다. 반공포로 석방은 UN군과 사전 동의가 없는 대한민국 정부 측의 일방적인 석방 행위였으므로 그 과정은 사전에 몰래 언질을 받은 반공포로들이 일제히 포로수용소를 탈출해 이를 대놓고 돕는 한국군과 한국 경찰, 그리고 이에 협조하는 민간인들의 보호를 받아 도망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포로들은 한국군과 한국 경찰이 미리 나가라고 뚫어준 전기 철조망을 통해 탈출한 뒤 민간인으로 위장해 전국에 골고루 분산되었거나 한국군이 미군을 '무력으로 제압'한 뒤 포로들을 탈출시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미 8군 사령부는 미군 방송으로 반공포로들에게 돌아오라고 하였지만 서울중앙방송국(KBS의 전신)에선 외국 기관(미군) 말을 듣지 말라고 방송하면서 아군 방송끼리 싸우는 희귀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6월 18일부터 약 5일 동안 35,400명의 반공 포로 중 약 26,900여 명이 수용소에서 석방되었습니다. 탈출 도중에 포로수용 책임이 있는 UN군의 사격으로 인해 61명이 사망하고 116명이 부상당했으며, 나머지 8,200여 명은 미처 석방 소식을 듣지 못했거나 UN군의 진압 등으로 인해 수용소에 잔류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UN군 측, 특히 미국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미국 정부에서는 이승만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으나, 한국 국민들과 한국 군부의 이승만에 대한 지지가 상당하여 섣불리 제거하기는 힘들었으며, 이 사건이 단지 동맹국에 대한 이승만의 의지 표출이지 이승만이 반미주의자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이승만 제거' 논의는 취소되었습니다. 미국은 이승만 암살 계획(에버레디 계획) 이후 그를 대체할 사람으로 장면 전 총리와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미국은 우방을 잃는 대신 적을 하나 얻었다"라고 말했고, 훗날 자신의 8년의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자다가 일어난 일은 그때가 유일하다고 회고했습니다. 미 국무장관 덜레스는 "등에 칼 꽂는 짓"이라고 비난했고 UN군 사령관 클라크는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지옥문이 열렸다"라고 말했으며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대재앙'이라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공산권 측의 의도에 반대해 일으킨 사건임이 명백했으므로 나름대로 반공 명분이 있었고, 미 8군 사령관을 역임했던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은 훗날 인터뷰에서 반공포로 석방은 이승만 대통령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1953년 6월 18일, 마지막으로 석방된 반공포로들이 이승만 대통령 사진을 들고 나오고 있는 모습.

 

반공포로 석방의 의미

 

이 사건이 당시 국제사회에서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어쨌든 풀려난 반공포로들은 당연히 이승만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북한에 가기 싫은데 강제로 북한에 보내질 상황에 처했다가 이승만이 밀어붙인 이 사건으로 구사일생한 셈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부담을 느낀 미국이 휴전을 추진하자 이승만은 "중공군 백만이 바로 코앞에 있는 상태에서 이대로 휴전을 받아들이라는 것은 한국민에 대한 사형집행 영장이다"라며 한국에 대한 안전보장 없이는 휴전을 할 수 없다며 극렬히 반대했고 반공포로 석방 사건을 일으켜 미국을 압박하였습니다.

 

결국 당장 휴전에 급한 미국이 양보하여, 이승만은 휴전을 방해하지 않는 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원조와 대한민국 국군 20개 사단의 무장 지원, 그리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냈습니다. 이처럼 그는 단지 휴전을 방해하지는 않겠다는 조건 하나로 강대국을 상대로 막대한 이득을 얻어냈습니다.

이로서 한국은 미국의 각종 원조와 확보된 안보를 토대로 이후 경제 발전에 자금을 올인할 수 있었고, 반공포로 석방으로 미국의 허를 찔러 따낸 한미동맹은 이승만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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