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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역사 속 오늘, 6월 16일: 432년 전, 이순신의 옥포대첩

해양맨 2024. 6. 16. 00:00

역사 속 오늘, 6월 16일에 일어난 일: 

1592년 - 옥포 해전이 일어났다.

1897년 - 미국과 하와이 간의 합병 조약이 체결됐다.

1903년 - 미국의 자동차 회사인 포드가 출범했다.
2020년 -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북한 측에 의해 폭파되었다.
2021년 - 바이든과 푸틴의 미러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오늘의 묵상: 옥포 해전

1592년 6월 16일, 432년 전 오늘,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이룬 전승 신화의 첫번째 승리인 옥포 해전이 일어났습니다.

 

옥포 해전은 1592년(선조 25) 음력 5월 7일(양력 6월 16일), 경상도 거제현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의 도도 다카토라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입니다. 

 

옥포대첩 기념비.

 

선조 25년이었던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4일) 일본군의 지휘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700척의 전선들과 18,700명의 병력이 부산포 해안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이것이 임진왜란의 시작입니다. 부산진 전투와 동래성 전투를 거치며 박홍의 경상 좌수영은 이틀만에 궤멸당합니다.

 

일본군의 대대적인 상륙에 경상도 일대는 패닉에 빠져 수령방백들이 임지를 버리고 달아났고, 일본군은 일사천리로 한양을 향해 북진했습니다. 한반도 남해안의 여러 섬과 포구를 장악한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일본 수군이 거제도 쪽으로 진출하자 원균은 전선과 무기들을 수장시키고 거느리고 있던 수군 10,000명을 해산시켰습니다. 그러나 원균은 전라도·충청도 지방에 이르는 해로(海路)의 목줄인 옥포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고 이순신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순신은 대형 전선인 판옥선 24척, 중형 전선인 협선 15척, 소형 쾌속선인 포작선 46척으로 구성된 전라좌수영의 함대를 이끌고 6월 13일 새벽에 여수항을 출발하여, 6월 15일 아침에 당포 앞바다에서 원균의 경상우수영의 함대(판옥선 4척, 협선 2척)와 합류했습니다.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의 연함함대 91척의 총지휘는 이순신이 맡게 되었습니다.

 

거제도 송미포에서 밤을 새우고 낙동강 하구의 가덕도로 항진하던 연합함대는 6월 16일 정오 무렵, 옥포에 정박 중인 일본 수군 함선 50여척을 발견하였습니다.

선봉장 이운룡을 선두로 돌격을 감행하며 맹렬한 화포 사격을 퍼붓자 기습을 당하고 전열을 갖추지 못한 일본 수군은 해안선을 따라 탈출을 시도했지만,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의 퇴로를 봉쇄하고 총통과 화살로 무차별 공격을 퍼부으면서 일본 수군의 선단을 해안선 쪽으로 압박하였습니다. 일본 수군의 일부는 포위망을 뚫고 해상으로 탈출하였으나, 나머지는 배를 버리고 해안에 상륙하여 산 속으로 도주하였습니다.

일본 수군의 배 26척을 침몰시켰으며, 잡혀있던 포로들을 구해내었고, 아군측 피해는 부상 1명에 불과했습니다.

 

옥포 해전은 임진왜란에서 가장 중요했던 제해권 장악의 시작이었으며 전략 무기였던 함선의 다수 격침이란 피해를 안겨줬습니다. 특히 일본군의 구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호령으로 모인 다이묘들이 자신들의 영지 병력을 데리고 참전한 케이스였고 도도 다카토라는 옥포 해전 이후 다시 전선을 만들고 병력을 보충해야 했기에 칠천량 해전 시점까지 해전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또한 이는 제해권에만 국한되지 않고 개전 이래 계속 패배만 했던 조선 육군에게 해전에서 처음 승리를 했다는 고무감을 심어 줌으로써 조선군이 재정비해 반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쟁에서는 기세가 중요한데, 적들이 파죽지세로 북상하고, 임금은 파천한다고 도성을 버리니, 조선군들은 도망가거나 투항하는 일 또한 빈번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임진왜란 후 조선이 거둔 이 첫 승전은 관군들이 결집하고 의병 활동이 시작하게 되는 중요한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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