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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역사 속 오늘, 6월 19일: 605년 전, 대마도 정벌

해양맨 2024. 6. 19. 00:00

역사 속 오늘, 6월 19일에 일어난 일: 

1419년 - 조선이 3차 대마도 정벌을 단행하다.

1865년 - 텍사스를 마지막으로 미 전역에 흑인 노예 해방이 단행되었다.
1944년 - 필리핀 해전이 시작되었다. 이 날 일본군은 항공기를 무려 314기를 잃었다.
1961년 - 쿠웨이트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2005년 - 연천 군부대 총기 난사 530GP(김일병) 사건이 일어났다.
2013년 - 여성이 남성을 강간해도 강간죄가 성립되도록 대한민국 법이 개정되었다.

 

오늘의 묵상: 대마도 정벌

1419년 6월 19일, 605년 전 오늘, 조선이 대마도(쓰시마섬) 정벌을 단행했습니다.

 

대마도 정벌은 고려와 조선 왕조에서 한반도를 침입하던 왜구의 주요 기항지 가운데 하나인 쓰시마섬을 3차례 토벌한 것을 가리키는데 일반적으로는 조선 세종 1년(1419)에 단행된 제3차 대마도 정벌을 칭합니다.

 

제1차 대마도 정벌: 고려 창왕 1년(1389) 2월, 전선 100척, 군사 10,000명

제2차 대마도 정벌: 조선 태조 5년(1396) 12월

제3차 대마도 정벌: 조선 세종 1 (1419) 음력 6월 19일, 전선 227척, 군사 17,285명

 

제3차 대마도 정벌 경로.

 

왜구의 침탈은 고려 멸망의 한 요인으로 꼽힐 만큼 심각한 피해와 타격을 주었는데, 고려 말에 왜구의 침탈을 피할 수 있었던 곳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그 피해가 극심하였습니다. 노략질에 대응하는 직접적이고 우선적인 대응은 당연히 무력적 응징, 즉 토벌이었습니다. 이러한 왜구토벌은 고려 말 정치세력으로서 무장세력이 대두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조선건국의 한 축이 되었던 무장들 역시 이러한 과정 속에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침략해 들어와 노략질하는 왜구를 토벌하는 차원을 넘어서 좀 더 근본적인 무력 대응으로 왜구의 주요 근거지인 대마도에 대한 토벌론이 제기되었습니다. 제1차 대마도 정벌은 1389년에 이루어졌는데, 이때 경상도원수 박위가 병선 1백 척으로 적선 3백 척과 가옥을 불태웠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왜구 대책은 수군의 정비와 전투력 증강을 통한 해상 방어체제의 충실화와 외교적 노력으로 왜구들에 대한 회유였습니다. 1396년(태조 5) 제2차 대마도 정벌에서는 항왜 등륙에게 선략장군을 제수하는 등 적극적인 온건, 포섭 정책을 폈습니다.

기해동정이라 불리는 제3차 대마도 정벌은 조선 초기 한일관계의 한 획을 그은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1419년 대마도 정벌의 직접적인 동기는 동년 5월에 있었던 대마도인들의 침략이었습니다. 1419년(세종 1) 5월 왜구는 50여 척의 왜선을 이끌고 충청도 비인현에 침입하여 병선을 불태우는 등 노략질을 한 비인현 왜구사건이 있었습니다. 대일강경책을 취해오던 조선은 이 사건을 계기로 왜구의 근거지를 토벌하여 우환의 뿌리를 뽑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1419년(세종 1) 6월 19일, 삼군도체찰사 이종무 이하 병력 17,000여 명이 병선 227척에 승선하여 거제도를 출발, 대마도로 향하였습니다. 이튿날인 20일 선발대가 대마도를 공격하여 적선 130여 척을 나포하는 등 대승을 거두고 정박하였습니다. 이어 이종무는 대마도주에게 회유문을 보냈으나 답서가 없자 26일 상륙, 적병 114명을 참수하고 21명을 생포하였으며, 1,939호의 가옥과 100여 척의 왜선을 불태웠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박실이 이끄는 좌군이 대마도의 매복군에게 당하여 조선군 100여 명이 전사하였습니다. 이후 이종무가 장기전 태세에 들어가려고 하자 당시 대마도 도주의 숙부가 군사의 철수와 수호를 간청함에 이종무는 공격을 중단하고 7월 3일 군을 이끌고 거제도로 귀환하였습니다.

기해동정은 출발에서 귀환까지 14일이 소요된 짧은 정벌 전이었지만 양측 합산 3,8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격렬한 전투였습니다. 조선은 이 정벌 전을 통하여 왜구의 본거지에 큰 타격을 주었고 많은 조선인 포로들을 송환하는 전과를 얻었습니다.

 

다만, 왜구의 주력 부대가 도내에 없었던 만큼 왜구 섬멸이라는 목적을 온전히 달성하지는 못하였던 데다 왜구가 반격을 가해왔던 때문에 철군 직후 곧장 재정벌 논의가 있었으나, 태풍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고, 7월 12일 요동에서 돌아오던 왜구를 대파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재정벌 논의가 종결되었습니다.

 

제3차 대마도 정벌 전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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