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1월 4일에 일어난 일:
1135년 - 고려의 묘청이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켜 묘청의 난을 일으키다.
1951년 - 6.25 전쟁: 1.4 후퇴로 조선인민군과 중공군에게 서울을 다시 내줌.
1982년 - 대한민국 중·고등학생의 머리와 교복의 자율화 방안 발표.
1987년 - 수사관들의 물고문으로 익사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발생.
2010년 - 두바이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부르즈 칼리파 개장.
오늘의 묵상: 1.4 후퇴
1951년 1월 4일, 73년 전 오늘, 6.25 전쟁 중 중공군의 공세에 밀린 UN군이 38도선 이남으로 철수함으로써 유엔군과 국군은 개전 이래 두 번째로 공산군에게 서울을 내주게 되었습니다.
6.25 전쟁 당시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수도 서울을 탈환한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 국경에서 북한의 임시수도 평안북도 강계시를 향한 마지막 공세를 준비하던 중,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의 대공세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1951년 1월 4일에는 수도 서울이 다시 공산군에 함락되어, 대한민국 정부는 부산으로 이동했고, 미 8군 사령부도 대구로 후퇴하게 됩니다.
이렇게 UN군과 국군이 다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1. 중공군의 참전: 마오쩌둥은 '입술(북한)이 없으면 이(중국)가 시리다'는 '순망치한' 이론을 내세워 한반도 파병을 결정합니다. 북한이 무너지면 한반도가 미국의 영향권에 들어가므로 북한과 접한 중국으로서는 북한이라는 바람막이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또한 미국이 국공내전시 마오쩌둥의 정적이었던 장제스를 지원했고, 타이완 문제에 중립을 지키겠다던 미국이 타이완의 일본귀속을 옹호하는 행위는 중국의 미움을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2. UN군의 방심: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은 중공군의 위력을 과소평가했고, 전선의 확장에 미리 대비하지 않았습니다.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통하여 중공군의 전략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는 한반도의 지형상 38도선을 지나 39도선을 넘어가면서 전선이 넓어지는 것도 간과했습니다. 중공군과 북한군이 넓어진 전선의 틈새를 파고 들면서 인해전술과 야간전투, 게릴라전 등으로 파상공격을 펼치자 아군은 패전을 거듭하여 12월 6일에는 평양을 내어주고, 동부전선에서는 12월 14일-24일 흥남부두를 통해 대대적으로 후퇴하게 됩니다.
다행히 서울이 함락되기 전 크리스마스 전날까지 진행된 흥남 철수 작전으로 아군 12만 명, 피난민 10만 명, 차량 17,000대, 군수품 35만톤을 안전하게 동해상으로 철수시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한파 속에 많은 피난민이 아사하거나 동사했고, 많은 이산가족이 생겼습니다. 그 당시의 참상과 이산가족의 비애를 담은 '굳세어라 금순아'는 아직도 많이 불리고 있습니다.
굳세어라 금순아 - 현인 / 1953 (가사)
1.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 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2.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히 떴다
3. 철의 장막 모진 설움 받고서 살아를 간들
천지 간에 너와 난데 변함 있으랴
금순아 굳세어 다오 북진 통일 그날이 오면
손을 잡고 웃어나 보자 얼싸안고 춤도 춰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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