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1월 22일에 일어난 일:
1506년 - 스위스 근위대 150명이 바티칸에 도착해 처음으로 임무 수행에 들어갔다.
1905년 - 러시아 피의 일요일 사건 발생
1999년 - 국가안전기획부의 명칭이 국가정보원으로 변경. 직급이 국정원장(장관급)으로 조정.
2000년 - 대구지하철 2호선 공사장이 붕괴되어 시내버스가 매몰, 3명 사망.
오늘의 묵상: 스위스 용병
1506년 1월 22일, 518년 전 오늘, 스위스 근위대 150명이 바티칸 교황청에 도착해 처음으로 임무 수행에 들어갔습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92–1503)는 재위 말엽, 스위스 용병들을 고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프랑스나 신성 로마 제국 때문에 이탈리아반도 내에서 여러 세력이 대립하는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이때마다 스위스 용병들은 일선부대로서 최전선에 나가 열심히 싸웠습니다.
교황 율리오 2세(216대 1503-13)가 즉위한 후, 추진하는 개혁에 반발하는 세력으로부터 교황청을 지키기 위하여 믿을 만한 용병들로 이루어진 근위대를 창설하고자 150명의 스위스 병사들이 1506년 오늘 로마에 입성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로마 교황청 근위대 창설 날짜는 공식적으로 1월 22일로 지정되었습니다.
스위스 용병들의 충성심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한 예로 1527년 5월 6일 적대국인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가 로마를 침공하여 함락되자 교황청에서 고용한 각 나라의 용병들은 싸움을 피하여 도망치기 바빴습니다. 그러나 스위스 근위대만큼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베드로 대성전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벌어진 전투 중에 500명 중 189명만 살아남게 되었는데, 이들 역시 교황이 베드로 대성당으로 피신하는 과정에서 겨우 42명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교황은 이들에게 조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했지만 충성서약을 깨뜨릴 수 없다는 이유로 끝까지 교황을 위해 싸우겠다고 맹세하고 로마제국 군대와의 싸움에서 모두 장렬하게 전사했습니다. 스위스 근위병들의 희생덕분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베드로 성당으로 피신한 후 이곳에서 800m 떨어진 산탄젤로성까지 이어진 비밀 통로를 통해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한 이들의 용맹함으로 인해 이후 주로 스위스 용병 출신들이 교황청 근위대에 기용되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또한 지금까지도 매년 5월 6일이 되면 바티칸에 주둔하는 신참 스위스 용병들은 충성서약을 하는데, 이는 1527년 당시 용맹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선배들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다른 예는, 1792년 프랑스혁명 당시, 폭도들이 듀일리 궁전을 공격했을 때, 소총으로 무장한 786명의 스위스 용병 근위대는 루이 16세 왕과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를 지키기 위해 시민군과 맞서 싸웠습니다. 루이 16세는 가족을 데리고 급히 궁전을 탈출하면서 용병 근위대장에게 불필요한 교전을 벌이지 말고 항복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미 왕을 지키던 프랑스 군인들도 다 도망간 상태였고 왕과 왕비도 무사히 피신했지만 “우리가 살겠다고 여기서 도망친다면, 훗날 어느 나라가 우리에게 용병 일을 맡기겠는가?”라며 죽음의 길을 선택한 786명의 용병들은 시민군과 싸우다 전멸하게 됩니다. 당시 스위스 용병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스위스 루체른에 있는 ‘빈사의 사자상’입니다.
이 사자상은 당시 튈르리 궁전의 근위대장이었던 카를 키퍼의 주도로 1821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사건이 있던 당시, 그는 공교롭게도 집안일로 고향 루체른에 가느라 참화를 피했습니다. 하지만 동료와 부하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처참하여 그들의 넋이라도 기리고 싶어 자신의 평생 숙원사업으로 이 기념비를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사자의 처절한 모습으로 용병의 최후를 표현한 덴마크 조각가 베르텔 토르발센의 작품을 선정한 후, 2년 간의 작업을 거쳐 암벽을 파낸 자리에 거대한 사자를 완성시켰습니다. 조각상에 보면, 창에 맞아 쓰러진 사자의 머리 앞에 스위스 십자가가 새겨진 방패가 놓여 있고 창상으로 인해 죽어가면서도 사자는 프랑스 왕실을 상징하는 백합 문양의 방패를 앞발로 품고 있습니다. 이는 루이 16세 국왕을 끝까지 지킨 충절을 상징합니다. 사자가 엎드린 자리 위에는 ‘스위스인의 충절과 미덕’이라는 라틴어 비문이 암벽에 새겨져 있습니다.
산악으로 뒤덮인 스위스의 척박한 환경은 산업의 발달이 거의 불가능한 지역으로 이런 지리적인 악조건 하에서 단련된 신체적 강인함으로 스위스인들은 오래전부터 교황청의 용병으로 재정적 수입을 충당하였습니다. 이러한 전통적인 용병제도는 프랑스의 아비뇽 교황청 시절에 양쪽으로 용병이 팔려가는 바람에 민족 간에 편이 갈려 전투를 했던 고난을 겪었으며,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 사이의 전투에 다시 한번 용병으로 팔려가서 동족끼리 살상하는 모순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잘 사는 나라 스위스가 되었지만 아직도 남의 나라에 돈을 받고 용병으로 지원하는 것을 나라에서 허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1) 중립국가인 스위스 출신의 용병이 정치적 중립성 측면에서 신뢰성을 인정받아 여러 나라로부터 수요가 많고, 2) 바티칸 교황청과 프랑스 궁전 근위병들이 보여준 충절과 명예를 귀중히 여기는 오랜 전통, 그리고 3) 용병들의 외화벌이가 국가경제에 기여하는 즉면도 무시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무튼 믿고 차는 스위스 시계, 믿고 맡기는 스위스 은행 등과 함께 스위스 용병은 또 하나의 스위스 상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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