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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역사 속 오늘, 1월 29일: 117년 전, 국채 보상 운동-IMF 금 모으기 이전에도

해양맨 2024. 1. 29. 00:00

역사 속 오늘, 1월 29일에 일어난 일:

661년 - 알리의 죽음으로 정통 칼리파 시대가 끝나다.
757년 - 연나라 황제 안녹산이 아들 안경서의 손에 죽다.
1886년 - 칼 벤츠가 최초로 휘발유 자동차의 특허를 획득.

1907년 - 대한민국, 국채보상운동 시작되다.

1996년 -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가 프랑스 핵실험의 완전 종료 선언.

 

오늘의 묵상: 국채보상운동

1907년 1월 29일, 117년 전 오늘, 서상돈의 주도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됐습니다.

 

국채 보상 운동은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고자 제공한 차관 1,300만 원을 국민들이 갚고자 한 운동으로 대구에서 서상돈, 김광제 등이 주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통감부가 베델이 모금액 중 2만 원을 사적으로 투자했다가 원금을 받지 못했다는 괴소문을 퍼뜨리는 등 방해를 일삼아 이 운동은 실패했습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이 한국에서의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반강제적으로 차관을 제공하였으나, 대한제국은 차관을 갚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1905년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타를 조선에 보내 화폐정리사업을 실시하여 대한제국의 은행들을 일본 은행에 종속시키고 차츰 대한제국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1907년 1월 초순 대구의 광문사(廣文社)의 부사장인 서상돈이  김광제 등과 함께 국채보상 취지문을 작성하여 전국에 반포하면서 전 국민의 동참을 호소하였고, 1월 29일 서상돈이 국채보상문제를 대구의 대동광문회 첫 모임에서 공식적으로 제의하였습니다.  그 후 2월 21일 대구 북문 밖 북후정에서 국채보상운동 대구군민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서상돈 등 수 천명의 유지 · 신사들과 시민들이 참석하여 의연금을 내면서 국채보상운동은 시작되었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에서 벌어지자 윤웅렬, 이상재, 유길준, 양기탁 등 조정의 관료들도 국채 보상 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대구 동인동(국채보상로)에 있는 국채보상운동 기념관 내부의 국채보상운동 행렬도. 국채보상운동에는 남녀노소, 신분과 계급을 넘어 온 민족이 한 마음으로 참여했다.



당시 언론기관인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이 참여하였고 남자는 담배를 끊고, 여자는 비녀와 가락지를 내면서까지 국채를 갚으려는 국민들의 열망은 뜨거웠다고 합니다. 이는 국민의 힘으로 국채를 갚으려 했던 유례없는 경제적 운동이었으나, 상위계층과 부자들의 참여가 부족하였다는 한계점이 있었고, 일본제국이 일진회를 조종하고 그 주도자인 양기탁을 구속하는 등 국채보상운동을 저지한 결과,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현재 대구에 가면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이 있는데, 이는 1907년 봄 대구에서 비롯된 국채보상운동의 시민정신을 기념하고, 1998년 제2의 국채보상운동 전개로 IMF 경제난을 극복한 우리 민족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조성된 공원입니다. 공원 내 달구벌 대종은 향토의 얼과 정서가 담긴 맑고 밝은 종소리와 함께 화합과 번영을 염원하는 대구시민들의 뜻을 온누리에 알리고자 1998년 12월 22일 설치되었습니다.

 

대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내에 설치된 달구벌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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