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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역사 속 오늘, 3월 13일: 400년 전, 이괄의 난 - 정묘/병자호란

해양맨 2024. 3. 13. 00:00

역사 속 오늘, 3월 13일에 일어난 일:

1624년 -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1938년 -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을 병합.
1954년 - 디엔비엔푸 전투: 비엣민(베트민, 월맹) 군대가 프랑스 군대에 대한 포격을 시작.
2016년 - 터키 앙카라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하여 34명이 사망하고 125명이 부상을 입었다.

 

오늘의 묵상: 이괄의 난

1624년 3월 13일, 400년 전 오늘, 이괄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조선 중기의 무신 이괄인조반정 때 광해군을 실각시키는 데 동참하여 큰 공을 인정받아 2등 공신의 첫자리에 올랐습니다. 본래 병마절도사로서 북방을 지키는 무장이었던 이괄은, 공신을 도성에 둬야 마땅하다는 김류의 주장에 따라 잠시 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좌포도대장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북방 후금의 낌새가 심상치 않자 인조는 이괄을 부원수로 임명하고 1만 5천 명의 대군을 내리고 방비에 임하게 합니다. 그런데 인조 2년 1월 17일에 별안간 이괄의 아들 이전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고변(변고를 알리거나 반역 행위를 고발함)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인조는 이괄이나 그의 아들이 반역했을 리가 없다고 굳게 비호해 주며, 이괄의 아들 이전만 국문하고자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괄은 아들을 잡으러 온 금부도사와 선전관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사실 금부도사가 찾아온 시점에서 이괄에게는 사실상 반역 외에는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자식이 역적이라는데 아비가 무사한 경우가 있더냐"

 

결국 전방의 최정예 군사 12,000여 명과 항왜(임진왜란 때 조선에 항복한 왜군)를 동원하여 관군들을 우회하거나 박살 내며 한양으로 진격했습니다. 이괄은 손쉽게 한양을 점령하고 선조의 10번째 서자였던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인조는 자신이 전폭적인 지지를 보이며 이괄에게 맡겨놓은 정예군단에게 쫓겨서 충청도 공주로 도망쳐야만 했습니다. 

 

백제의 왕궁이었던 공주 공산성 쌍수정 사적비.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 머물렀을 당시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괄은 정충신에게 참패하고 겨우 목숨을 건져 경기도 이천으로 달아났으나 부하인 이수백과 기익헌에게 배신당하여 취침 중 목이 잘립니다. 이괄의 난은 도성을 점거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고도 실패한 유일한 반란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이괄에게 준 15,000명의 정예병을 잃으면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초기 방어에 실패하게 됩니다. 또한 이괄의 패잔병들이 여진족에 투항하여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리며 남침을 종용하고, 여진족의 조선 침입 시 길잡이 노릇을 했으니, 결국 이괄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기반을 만든 셈이 되었습니다.

 

이괄의 난을 보면서, 문신을 무신보다 우대하던 조선 시대의 숭문사상을 타파할 좋은 기회를 놓쳐 아쉽다는 의견과, 고려의 무신정권 같은 것이 다시 들어서는 것을 막아내어 다행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역사는 역시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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