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3월 15일에 일어난 일:
BC 44년 -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 회랑에서 마르쿠스 브루투스 일당에게 암살당하다.
1493년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로의 1차 항해를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오다.
1960년 - 이승만 정권하에서 3·15 부정선거와 이로 인한 마산의거가 발생하다.
2019년 -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 있는 모스크에서 총기 난사 사건으로 최소 49명 사망.
오늘의 묵상: 3·15 부정선거와 마산의거
1960년 3월 15일, 64년 전 오늘, 3·15 부정선거와 이로 인한 마산의거가 발생했습니다.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제4대 대통령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를 일컬어 3‧15 부정선거라 부릅니다. 1959년 이승만이 불출마선언을 뒤집고 4선 출마를 표명하면서 자유당정권은 당을 중심으로 중앙 및 지방 정부, 청년단체 등 외곽조직을 장악하여 부정선거를 치밀하게 준비했습니다.
당시 정치 상황을 살펴보면, 1956년 5월 15일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조봉암 후보의 득표율은 30%에 육박했고, 같은 날 치러진 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 장면 민주당 후보가 이기붕 자유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습니다. 2년 후 치러진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은 서울 지역 16개 의석 중 단 한 석을 획득하는 데 그쳐, 자유당에 대한 민심의 이반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습니다.
이에 정권 유지에 심각한 불안감을 느끼게 된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은 1960년 예정된 제4대 대통령 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의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유당은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을 지명하며 빠른 선거대비 태세에 들어간 반면, 야당인 민주당은 막바지에 구파의 조병옥을 대통령 후보로, 신파의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각각 지명했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야당 내에 생긴 불신과 갈등을 이용하고자, 기존 5월보다 이른 3월 15일을 선거일로 공고했습니다. 조기 선거를 반대하던 조병옥은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갔지만, 치료 중이던 2월 15일 갑자기 사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야권의 대통령 후보가 선거 한 달 전 갑자기 사라지면서 단독후보가 된 이승만의 당선은 확실시되었습니다.
이제 선거의 초점은 부통령선거였는데, 정부와 자유당은 이기붕의 확실한 부통령 당선을 위해 선거 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갔습니다. 한편 2월 13일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통령은 꼭 동일정당에서 나와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당선되어도 따르지 않겠다는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3월 15일 선거 당일, 전국적으로 대리투표, 사전투표, 무더기 투표, 3인조 공개투표가 진행되었으며, 민주당 참관인의 투표소 입장 및 참관 방해, 유권자와 취재기자 폭행, 번호표 미교부 등의 사태가 벌어졌으며, 자유당 완장부대와 경찰, 반공청년단은 곳곳에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선거 결과 이승만은 유효투표 수의 88.7%에 해당하는 960여만 표를, 이기붕은 79%에 해당하는 830만여 표를 득표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민주당은 3월 18일 오전 국회 본회의에서 선거 무효 선언문을 낭독했고, 야당 의원이 총퇴장한 후 자유당 단독으로 정·부통령 당선자를 공표했습니다.
한편 선거 당일 전라남도 광주시에서는 투표소에서 부정표를 발견한 한 시민이 선관위에 항의하자 정치 깡패가 무자비하게 폭행한 것이 발단으로 시민 1천여 명이 금남로에 모여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를 벌였습니다.
마산지역에서 발생한 부정선거 규탄 시위는, 3.15 마산 의거라고도 함, 4·19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선거 당일 마산시의 민주당 간부들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 안으로 들어가 40% 사전투표와 3인조 공개투표를 비롯한 자유당의 부정 선거 현장을 확인하고 곧바로 당사로 돌아와 시위를 준비했습니다. 민주당 간부와 시민, 학생으로 이루어진 시위대가 행진해 감에 따라 수천 명이 합류하였고, 경찰이 강력히 대응하자 시위 군중은 밤 9시경에는 만여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때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 중 정전되자 경찰은 시위대에 총격을 가했는데, 경찰의 발포는 시위대를 더욱 분노시켜 경찰에 돌을 던지며 맞섰습니다. 이날 경찰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고, 870여 명이 부상당했다고 합니다. 이 날 시위에 참가했던 학생 김주열이 실종된 지 27일 만인 4월 11일 아침 그의 시신이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며 4·19 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역사속 오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 속 오늘, 3월 17일: 54년 전, 정인숙 살해 스캔들 (0) | 2024.03.17 |
---|---|
역사 속 오늘, 3월 16일: 105년 전,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 (0) | 2024.03.16 |
역사 속 오늘, 3월 14일: 33년 전, 낙동강 페놀 유출 - 두산그룹 (1) | 2024.03.14 |
역사 속 오늘, 3월 13일: 400년 전, 이괄의 난 - 정묘/병자호란 (1) | 2024.03.13 |
역사 속 오늘, 3월 12일: 77년 전, 트루먼 독트린 발표 - 냉전 시작 (0) | 2024.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