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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역사 속 오늘, 8월 23일: 53년 전, 실미도 사건 발생

해양맨 2024. 8. 23. 00:00

역사 속 오늘, 8월 23일에 일어난 일: 

  660년 - 백제 계백 장군이 황산벌에서 전사 

1986년 - 창경원을 궁궐로 복원한 창경궁 개궁식(開宮式) 거행
1971년 - 실미도 사건 발생

1973년 - 경주 천마총에서 천마도 발견
2001년 - 대한민국이 IMF 측에 구제 금융 195억 달러 전액을 상환하면서 약 3년간의 IMF 관리 체제 종료
2008년 - 대한민국이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쿠바를 3-2로 꺾고 올림픽 야구 첫 금메달 차지 (야구의 날로 지정)

 

오늘의 묵상: 실미도 사건

1971년 8월 23일, 53년 전 오늘, 실미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실미도 사건'은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 실미도에 위치한 공군 684부대 북파공작원들이 기간원들을 살해하고 부대를 이탈하여 시외버스를 탈취해 청와대를 향해 돌진하다가 대방동에서 군경과 대치하다가 자폭한 사건으로 당시에는 '8.23 난동사건'이라고 칭하였습니다.

 

당시 684 북파부대 소대장이었던 김방일이 '실미도 육성증언'에서 공개한 실미도 부대원의 사진.

 

 

 

1968년 1월 21일, 소위 '김신조 사건'으로 알려진 1.21 사태가 일어났는데, 북한이 무장 게릴라를 보내 당시 국가원수였던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복수(김일성 암살)를 계획했습니다. 3군에 1개씩 이를 전담할 특수부대를 창설했는데 그중 공군 산하에는 68년 4월에 창설된 684부대가 실미도에 비밀 훈련 기지를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초부터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중앙정보부장이 교체되는 등 상황이 변하면서 암살 계획은 점차 뒤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부대 예산 착복에 의해 이들에 대한 대우도 나빠졌고, 봉급이 끊기고 음식 배급이 부실해졌습니다. 게다가 자원한 소대장 김방일 공군 중사 1명 외에는 특수전 출신 교관 및 조교들이 대부분 떠나고 이쪽과 별 관계없는 기간원들이 들어오면서 부대원들은 불만이 쌓이고 점차 불안해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보안 유지를 위해 부대원들을 몰살시키자는 얘기도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 24명의 부대원들은 정부에 불만을 품고 박정희를 만나 담판을 짓고자 탈영을 도모하게 됩니다.

 

 

1971년 8월 23일 부대원들은 훈련을 담당하던 교관과 기간병력 23명 중 18명을 죽이고 탈주하여 인천에 상륙했습니다. 기간병력들 중 출장 나가 있던 김방일 소대장과 병사 5명 등 총 6명이 살아남았으며 이들은 화장실이나 숲 속에 숨거나 바다에 뛰어들어 어선에 구조되어 목숨을 건졌습니다. 684부대원 24명 중 1명도 교전 중 사망하여 결국 23명이 실미도를 탈출했습니다.

이들은 시외버스 한대를 탈취하여 경인국도를 타고 부평, 소사, 영등포를 거쳐 청와대로 돌격하려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무장공비로 간주되어 서울 동작구 대방동 유한양행 구 본사 건물 앞에서 육군 및 경찰 부대에 포위, 저지되었습니다. 여기서 684 부대원들과 진압군은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지만, 684 부대원들이 포위망을 돌파할 가능성이 없어지자 버스 안에서 수류탄으로 자폭하였고 다행히 4명은 목숨을 건졌습니다.

 

생존한 4명은 1972년 1월 11일 군사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고 70일 후인 1972년 3월 20일 총살됐습니다. 사형 판결전진상 조사를 앞둔 생존자들에게 군 관계자가 찾아와서 '이대로 가면 어차피 사형당할 거야. 마지막 기회다, 같이 월남 파병 가자. 그 대신 누가 묻더라도 보안상 절대 말할 수 없다고 해. 그래야 니들 모두 살 수 있어.'라고 말했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사망소식은 사건 발생 후 35년이 지난 2006년 10월에서야 유가족들에게 통보되었습니다.

 

684부대 창설 멤버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김방일 전 소대장은 사건 이후에도 공군에서 계속 복무했으며 준위까지 진급하고 1990년 퇴역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684부대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며, 또한 영화 '실미도'도 보았지만 실미도가 개봉한 지 2년 뒤인 2005년에 사망했습니다.

 

한국 최초 천만관객 기록을 세운 영화 '실미도' 포스터. 2003년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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